지나간 상처 속에서 피어난 꽃
이별의 계절
문자 알림이 왔다.
아연은 택배 문자가 온 것을 확인했다.
"내가 뭐 주문했나?" 요즘 온라인 쇼핑을 자주 했던 건 사실이다.
아연은 천천히 문 밖을 확인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밖에는 꽃다발이 있었다. 델피늄 꽃다발이었다.
그녀는 델피늄 모종을 심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남자친구와의 이별로 힘들어했던 그녀에게 델피늄 정원의 주인이라는 여자를 만났고
모종을 심으며 펑펑 울었던 그날의 향기가 스쳤다.
이별로 아파하다 델피늄 정원을 찾아간 이후로 아연은 스스로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전공 공부를 열심히 했고 학점을 올리며 장학금도 받았다.
동아리에 가입해서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다른 학과 친구들도 사귀고, 맛집도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관심은 있었지만 망설였던 발레도 배우기 시작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마다 행복지수는 높아졌다.
도전은 어려웠지만 그 뒤를 따라오는 성취감이란 언제나 짜릿했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연이 바쁘게 살아갈수록
서서히 잊혀 이제는 많이 희미해졌다.
꽃다발 안에는 쪽지도 함께 있었다. '정원 주인'으로부터.
'잘 지내죠? 아연 씨가 심었던 꽃을 선물로 보낼게요.'
아연이 심었던 모종이 어느새 자라 예쁜 꽃다발로 찾아왔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에 아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행복한가요?'
멍든 시간
서현은 학교 사물함에 들러 전공책을 챙기러 3층으로 향했다.
사물함 안에는 꽃다발이 들어 있었다.
예전에 본 적이 있다. 직접 심어도 봤었다.
델피늄 꽃다발이었다. '정원 주인으로부터'라고 적힌 쪽지도 함께 있었다.
델피늄 향기에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예전에 정원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중학생 시절 내내 시달렸던 학교폭력이 성인이 된 그녀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과거와
그런 자신을 위로해 주었던 델피늄 정원의 주인.
서현은 여자의 위로를 받고 용기를 내기로 했다.
무엇보다 현재의 자신에게 애정을 쏟기로 했다.
대학교 생활 속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활발할 필요도, 많은 사람들과 어울릴 필요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면 되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아침에 헬스장을 다녀오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최근에 가입한 학술 동아리 활동에 참여했다.
동아리 부원들 모두와 어울리려고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가 스스로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사람들이 다가왔다.
때로는 성희가 먼저 손을 내밀기도 했다.
처음 말을 건네는 순간이 어렵다고 느껴질 뿐,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를 괴롭힌 진아는 더 이상 기억 속에 없었다.
온전히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을지라도 성희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혹여나 나중에 진아에 대한 기억이 조심스럽게 찾아오더라도
성희는 이제 무서워할 필요도, 괴로워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 알고 있다.
자신은 충분히 빛나고 잘난 사람이었다. 딱히 그 기억에 의해 위축될 이유가 없었다.
그냥 진아가 이상한 사람이었다. 훗날 그런 유형의 이상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성희는 자신이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시간표 짜고 수강신청을 하는 그 긴장감이 설렘으로 다가온다.
자신에게 어떤 색깔이 어울리는지,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 어떤 헤어 스타일이 어울리는지 알아가며
나날이 멋있어지는 그녀 스스로가 정말 뿌듯하다.
강의실에 들어갈 때의 스산한 공기에 기분이 좋다.
성희는 새로운 것의 두근거림에 행복하다. 과거의 멍든 시간 따위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상관없다. 난 소중하니까.
이따금씩 멀리서 델피늄 정원의 모습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운동을 하거나 동아리 부원들과 술자리를 갖는 등
삶의 소소한 재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후로 델피늄 정원은 더 이상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정원의 주인은 그런 성희를 알고 있는 것처럼 오늘 그녀에게 꽃다발을 보냈다.
성희가 직접 심은 꽃이 어느덧 아름다운 꽃다발이 되어 그녀를 만나러 온 것이다.
마치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성희 자신처럼.
'앞으로도 당신의 인생을 행복으로 가득 채우길 바라요.'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