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금은 냈고 수강정정은 지났다
방학 때는 새벽 4시 이후에 잠들어도 아침 11시에 일어나면 되었다.
스터디가 있는 날이어도 10시에만 일어나면 되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 내 유일한 자유였다.
하지만 이제 개강이 시작되면서 모든게 달라졌다.
매일 아침 8시 기상이라는 형벌이 주어졌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뜨는 게 아니라
조교 출근 생각만으로 강제로 몸이 일어난다.
학부생이었을 시절을 떠올리며
조교가 조금이라도 실수해서 과제 제출을 잘못 체크한 날이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왜 일을 똑바로 안하는거지?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너무 대충 하는 거 아닌가.
그때는 몰랐다.
조교가 사실 교수님과 학생 사이에서 양쪽 눈치를 보며
출석과 과제, 시험과 질문에 치여 매일 살아남는 직업이라는 걸.
이제 내가 조교가 되어보니,
그때 했던 생각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가슴을 찌른다.
나는 지금, 그때 학부생이 비난하던 바로 그 조교가 되어 있었다.
이번 주부터 조교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출석 체크, 강의실 준비, 학생 질문 처리까지.
교수님과 학부생 사이에서 양쪽 눈치를 다 봐야 하는 자리.
연구실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나도 몰라, 그냥 힘내자.”
도움이 아니라 동반 몰락 선언 같았다.
그러는 사이 내가 해야 하는 과제는 폭탄이 되어 돌아왔다.
논문 읽기, 팀플 준비.
교수님들 눈에는 우리가 하루 48시간 사는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현실은 24시간인데 그중 절반은 연구실과 강의실에 갇혀 산다.
남은 시간은 쉴틈도 없이 과제하다 잠드는 시간이다.
이번 학기 내가 듣는 수업 중 하나는
한국어보다 영어를 훨씬 더 선호하는 교수님의 강의다.
방학동안 영어랄 하도 싸워서 이제는 트라우마로 남았는데
이 수업에서는 절대 한국어를 쓰면 안된다.
무언의 압박이라고 하는게 맞다.
솔직히 수업 하나쯤 드랍하고 싶었다.
하지만 등록금은 이미 냈고 수강 정정 기간도 지났다.
내 선택지는 없다.
즉, 도망갈 데는 이제 하나도 없다는 뜻.
하기 싫어도 한다. 울면서도 한다. 결국 한다.
거기에 덤으로 날 괴롭히는 건 학생들의 이메일이었다.
“조교님, 과제가 안 올라가요.”
“오티 첫 날 출석체크는 하셨나요”
“제 파일이 안 열리는데 확인해주세요.”
메일 알림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고
답장을 쓰려다 보면 위가 쓰려왔다.
메일함을 열때마다 위염이 온다.
27주차를 돌아보면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정체성을 오갔다.
대학원생, 연구생, 조교, 민원 처리자.
직업만 네 가지를 동시에 하는 삶.
대학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현실이 비극인지조차 헷갈린다.
결론은 단순하다.
등록금은 냈고 수강 정정은 지났으며 몸은 망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