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을 살아낸 나의 엄마에게
이 시기의 우리 가족은 2-3년에 한 번씩 아파트 단지 내에서, 혹은 이 단지에서 옆 단지로 몇 번씩 이사를 다녔다. 우후죽순 생겨났던 80~90년대의 네모 반듯한 아파트들. 아마도 내 기억으로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우리는 자그마한 복도식 아파트에서 살았던 것 같다. 아파트살이가 거의 처음일,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봤자 지금 내 나이 정도밖에 되지 않을 승주 씨와 동네 이모들에게 우리 집은 사랑방이었다.
당대 결혼한 여자들은 보통 밖에서 일을 하지 않는 분위기였기에 승주 씨는 집에 혼자 있을 때는 부지런히 미싱을 돌렸고, 부업거리가 있으면 같이 할 이모들과 다 같이 집에 모여서 깔깔거리며 제품 부품을 끼워 넣거나 소일거리들을 했다. 때 맞춰서는 열무든 무든 야채를 사 와 다 같이 김치나 장아찌를 담갔고, 큰 화면의 TV로 바꾸고 나서는 다 같이 TV를 구경하기도 하고, 그 이후로는 과일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기도 했다. 뉴스를 보면서는 1999년도에서 2000년도를 넘어갈 때 정말 지구가 멸망할 것 같냐는 지금은 시덥잖지만 그때는 중대했던 이야기들도 나누면서.
이제는 우리가 이사를 여러 번씩 다닐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전세살이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다지 좋기만 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 이사는 그저 신나는 놀이와도 같았다. 집을 보러 오는 아저씨와 아줌마들을 보는 것도 신기했고, 이번에는 근처 어떤 아파트, 어떤 동으로 이사를 가는지, 어느 집으로 구경 갈지, 이번에는 어떤 방을 쓸지 고르는 것이 그저 재밌기만 했다. 더군다나 어디를 가든 친구가 잔뜩 생기는 승주 씨 덕분에 이사를 할 때마다 나에겐 더 많은 이모 삼촌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인 나에겐 언니 오빠, 동생들이 생겨났다.
복도식 아파트에서 한 층에 사는 사람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드는 계단식 아파트로 집을 옮겼을 때도 물론 이런 상황들은 마찬가지였다. 승주 씨는 김치, 부침개, 뭐 어떤 음식이든 맛있는 건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단순히 음식을 해서 나눠주는 것뿐만 아니라 옷을 수선해야 한다고 하면 옷을 들고 와 수선도 해주고, 짐을 옮겨야 한다고 하면 호진 씨와 같이 가 손을 거들어주고,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면 문을 활짝 열어서 앞집에 사는 사람들이 누구든 엘리베이터가 열리면 자연스럽게 우리 집으로 들어오게 하곤 했다. 다행히 이런 우리와 잘 맞았던 앞집 사람들 덕분에 사실상 우리 층은(두 집이지만) 네 집, 내 집 할 것 없이 항상 오픈형 대문이었다.
이런 그와 그녀의 문화는 정말 신기하게도 2024년 현재도 진행형이다. 재개발 때문에 잠시 이주를 하느라 3년 된 타 지역 신축 아파트에 들어간 승주 씨와 호진 씨. 엘리베이터에 누가 타든 인사조차 하지 않은들 이상하지 않은 요즘 시대에, 층마다 누가 타든 다들 무표정으로 탔다가 승주 씨를 보면 아주 반갑게 다들 알은체를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우리 승주 씨가 새삼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다. 윗집 쌍둥이 아기들이 툭하면 편지를 써서 내려오고, 앞집 아기 엄마는 이사를 가서도 승주 씨한테 전화를 걸어 고부갈등을 털어놓고, 7층 아줌마는 남편 회사에서 나온 거라며 물티슈 박스를 놓고 간다.
삭막한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이 승주 씨에게 이런 것을 나누기까지 승주 씨는 어떤 마음과 어떤 애정을 나누었을까. 아직은 그래도, 아마도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 언니 오빠였던 사람들이, 혹은 옛날의 그런 정 많은 모습을 마음 한편에 품고 사는, 현재는 이미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된 이들에게 승주 씨의 작은 관심이 참 반가운 어떤 거였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덕분에 나도, 작은 꼬맹이에 불과했지만 그 기억이 여전히 좋기에. 가끔은 만두를, 가끔은 장아찌를 만들어 꽉 막힌 앞집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곤 한다. 이런 따스함이 끊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말 나중에 나의 아이도, 이런 나의 모습을, 그리고 할머니의 모습을 생각하길 바라는, 이런 정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는 작은 바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