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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하루 Jun 17. 2024

3)

그 시절을 살아낸 나의 엄마에게


 승주 씨는 미싱공장에 같이 다니던 아는 언니로부터 호진 씨를 소개받았다. 승주 씨를 만나고는 방학동에서 광명까지. 그 먼 거리를 거의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틈이 날 때마다 그녀를 보러 왔었다는 그 시절 로맨티시스트 호진 씨. 그는 그녀와 연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승주 씨를 집에 데리고 갔다. 방학동 판자촌 다세대 주택의 크지 않은 집. 승주 씨는 그때를 떠올리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얼마 되지도 않아서, 변변찮은 거 하나 없는 집에 데려왔을까 싶었지."라고 이야기했다.


 승주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녀는 보잘것없는 판자촌일지 몰라도 그 속에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우리 정순 씨와 만복 씨가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이었고, 자신의 집과 가족을 어떤 불편함이나 부끄러움 없이 보여주는 그런 소박한 호진 씨가 참 좋았다고 했다.


 그렇게 그들은 결혼을 했고, 호진 씨 회사 근처이자 만복씨네와 가까웠던 의정부 지하방에 600만 원짜리 집을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작은 부엌이 있는 원룸 같은 공간. 화장실도 없고, 지하라 부엌에서 물을 버릴 수도 없는 그런, 2024년에는 절대로 결혼이 성사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신혼집 이야기.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의 첫 시작에 대해 묻는 나에게 “우리 진짜 악착같이 열심히 살았지? “라며 환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하며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두 눈에 마치 그때의 꿈이 빛나던 두 사람의 모습을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가족에 대한 같은 꿈을 가진 두 젊은이는 악착같이 1년을 살았고 1년 뒤에 똑같이 600만 원을 더해 여전히 화장실은 없지만 그래도 부엌에 물을 버릴 수 있는 같은 건물 1층으로 집을 옮겼다.  


 감사하게도 가까이에 살았던 만복 씨와 정순 씨는, 특히나 승주 씨의 시엄마였던(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엄마가 할머니에게 '시'자를 붙이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그냥 할머니는 엄마에게 "엄마"였다.) 우리 정순 씨는 그냥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어릴 때 승주 씨가 시댁 근처에서(그리고 아파트 입주 전에는 몇 달 같이 살기도 했단다.) 살았단 소리를 들었을 때는 '할머니가 착해서 엄마는 그래도 좋았겠다',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승주 씨 같은 사람도 없기에 '엄마 같은 며느리가 있어서 우리 할머니도 참 좋았겠다' 싶기도 하다.


아들 돌에, 스물 다섯의 승주 씨와 정순 씨. 온갖 좋은 걸 다 가져다 차린 아들의 돌상. 승주 씨 웃음이 너무 예쁘고 밝아서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사진.



 쨌든 하루하루 부단히 열심히 살아 낸, 이제 막 20대 중반인 젊은 신혼부부는 그렇게 작은 지하방에서 시작하여 첫째 아들을 낳고, 둘째 딸을 낳고. 결혼한 지 채 3년이 되지 않아 (비록 전세지만) 의정부에 있는 4700만 원짜리 아파트를 얻었다. 가진 건 없지만 열심히 살아 조금씩 집을 키워가자던, 아들 딸 하나씩 낳아 평범하게 잘 살자던 그들의 꿈이 실현되어 가는 찬란하게 빛나던 순간들이었다.


 승주 씨는 지금도 그러하듯 그때도 처음 보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사교적이었고 전라도 출신답게 아주 손맛이 좋은 사람이었다. 거기에 질세라 호진 씨 또한 그녀의 새로운 친구들을 처음 봐도 편하게 해 줄 수 있을 만큼 꽤나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며 승주 씨 못지않게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은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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