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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하루 Jun 10. 2024

1)

그 시절을 살아낸 엄마에게

 엄마가 울었다. 두 번이나. 그래서 결국 나는 미루기를 그만하고 책상 앞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언젠가부터 막연히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왜인지는 모르겠다. 맨날 책을 끼고 살던 그런 여자아이여서 그런가 생각하면 딱히 그것도 아니다. 뭐 고등학교 때야 반에서 유행하던 김진명,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추리소설에 빠져있기는 했어도 그 소설들이 나에게 엄청난 창작의 욕구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도 서른 살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이 마음속에는 막연하게나마 언젠가 꼭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이 저 한구석 귀퉁이에라도 항상 남아있었다. 현생에 치이고 치여 그 다짐이 지워졌으려나 하고 들여다보면, 이미 깊게 팬 자국처럼 절대 지워지지 않을 글씨로 꾸역꾸역 "책 쓸 거야. 언젠가는. 꼭" 하며 남아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글을 쓰기 위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본 적은 딱히 없다. 그렇지만 내 글의 주제만큼은 처음부터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엄마‘. 어쩌면 누군가는 mz세대를 지나 알파세대를 외치고 여성평등을 외치는 이 시대에, 고리타분하고 뒤처지는 주제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글을 쓴다 면 꼭 엄마를 주제로, 엄마를 둘러싼 가족의 이야기로 글을 써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엄마 말고 진짜 우리 엄마, 김승주 씨를 둘러싼 이야기.


 아무튼 이 흐릿하지만 분명했던 내 오래된 다짐이 비로소 오늘 엄마의 눈물로써 실행에 옮겨지게 된 거다. 승주 씨는 호적상으로는 1967년생이지만 1966년 전라도의 작은 산골짜기에서 첫째 아들 아래 첫째 '딸'로 태어났다. 아직 농촌사회를 벗어나지 못 한 한국 땅에서 가족이자 노동력이었던, 자식들을 대부분 5명은 낳던 시절. 100일도 채 되지 않아 울음소리 몇 번 내지 못하고 죽는 아이들이 많아 출생신고도 엉망이었다던, 나에게는 까마득한 시절. 우리 승주 씨는 다행히 잘 살아내 그래도 호적에 이름을 올렸고, 1990년, 나의 아빠인 호진 씨와 결혼을 했다.



 지금 내 주변 사람들 중 대놓고 "우리 부모님은 정말 가난했대!" ,라고 말하는 사람이 딱히 없어 잘은 모르겠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은 가난하고 어려웠다고 했다. 적어도 승주 씨만큼은 진짜 그랬던 것 같다. 학교를 가려면 고개를 몇 개 넘어야 했고 그마저도 겨울이면 집에 돌아올 때 길이 이미 어두워져 캄캄한 어둠 속에 누군가가 마중을 나와 있어야 마음 놓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근데 또 그마저도 장녀였던 승주 씨는 그 작은 체구로 나무를 하고, 농번기에는 농사일을 돕느라 일주일 중 학교에 갈 수 있는 날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고 이모는 이야기했다.


 갑자기 웬 이모냐고?


 나는 중학교 때까지 (아니 사실은 그 후에도) 승주 씨의 옛이야기를 엄마 입에서 들어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 승주 씨가 학교에 대해서 이야기 한 건 내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 "학교에서 부모님이 학교 어디까지 다녔냐고 하면 중학교까지라고 이야기하면 돼. 그때 손을 들어. 알겠지?"라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 학교에 다니는 게 당연하긴 했어도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세상은 가족뿐이고 학교라고는 초등학교가 전부였던 나에게 승주 씨가 중학교까지밖에 다니지 못(이든 '않'이든) 했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하지도 의아하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며칠 뒤 학교에서 정말로 "엄마가 초등학교까지 나온 사람, 엄마가 중학교까지 나온 사람, 엄마가 고등학교까지 나온 사람?" 하며 눈을 감기고 때에 맞춰 손을 들게 했을 때, 슬쩍 뜬 실눈에 엄마가 중학교까지 나왔어요, 하며 손을 들고 있는 친구들이 꽤나 있었기에 나에겐 이 사실이 정말로,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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