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을 살아낸 나의 엄마에게
한 번은 승주 씨와 호진 씨와 함께 밥을 먹다가 내가 태어나기 이전은 어땠을까 궁금해 슬쩍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럼 그 지하방에 살 때는 아파트 살 때처럼 사람들이 많이 오진 못했겠네? "
"에이 그럴 리가 없지, 그 지하방에 살 때도 너네 아빠 회사 사람들이 툭하면 집에 와있었어. "
"그 좁은 집에서? 말도 안 돼. 엄마는 그럼 어디 가있고?"
"엄마도 같이 있었지. 집에 올 때마다 재료나 음식을 잔뜩 가지고 왔어. 그럼 그 재료로 맛있는 거 차려주고, 자리 좀 피해 줘야겠다 싶으면 2층 주인아줌마댁에 가있고."
처음 600만 원짜리 지하방에 신접살림을 차렸을 때, 당연히 그때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나의 엄청난 착각이었다. 당시 그 의정부 주택 구조는 지하방, 1년 뒤 승주 씨네가 들어가 살게 된 1층, 그리고 주인댁 2층으로 되어 있었다. 지금 나에겐 너무나도 충격적인, 부엌에 물도 못 버리고, 화장실도 공용을 써야 하는 그런 불편한 지하방이 당시의 호진 씨와 승주 씨 집이었지만 그럼에도 이 집과 사람들이 좋은지 회사 가까운 곳에 있던 호진 씨 집은 자주 북적였다고 했다.
"에이 아빠 너무했다, 그 좁은 집에 맨날 아저씨들 데리고 와서 놀고." (기껏해야 지금 내 나이만 했을 그들에게 아저씨라고 말하려니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든다. )
"그래도 사람들이 꼭 우리 집에 올 때면 술이든 재료든 다 싸들고 오지, 그리고 오면 마치 자기들 일처럼 알아서 엄마 시다부터 하니 엄마도 크게 미워하지 않았지. 워낙에 다들 친하기도 했고."
당시 미싱 공장에서 퇴근 후에는 집에 와서 미싱 할 일거리들을 정리했다던 승주 씨. 호진 씨 친구들, 선후배들은 먼저 호진이네 집에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승주 씨가 하고 있는 일들의 시다(미싱을 하는 사람들의 보조는 아무래도 '시다'라는 단어만큼 정확한 게 없는 듯하다.)를 자처하며 하루의 일을 빨리 마감할 수 있게 했다. 아마 열심히 사는 승주 씨를 그저 자연스럽게 돕고 싶은 마음 반, 그녀를 빨리 돕거나 혹은 자유롭게 하여 맛있는 안주를 빠르게 먹고 싶은 마음 반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우리 그 덕에 금방 아파트도 얻을 수 있었잖아. 그렇지 여보?"
"그렇지. 그 아저씨들이 우리 집 구하라고 돈을 막 싸가지고 와서 빌려줬으니까."
이게 또 무슨 소린지. 돈을 싸들고 와서 건넸다니.
당시 호진 씨가 다니고 있던 회사에서는 인당 500만 원씩의 대출이 나왔다. 이자는 500만 원당 한 달에 1만 원씩. 그 아저씨들은, 아니 그 오빠이자 형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대출을 갚는 대로 또다시 500만 원 대출을 받아와 집 사는 데 보태라며 500만 원이 가득 든 봉투를 호진이 네에 건넸다. 한두 명의 사람들이 아닌, 이 집에서 먹고 자며 추억을 쌓은 많은 이들이 이렇게 건넨 마음 덕분에 호진 씨와 승주 씨는 예정보다 더 금세 아파트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빚진 마음을 빨리 갚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하루하루 더 열심히 살아냈고 결국 1년도 안 되는 새 그 돈을 다 갚고 빚 하나 없이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지금은 쉬이 보기 어려운 시절 낭만이랄까. 서로 돕고 돕는 마음과 더 나아간 행동이 너무나도 당연한 의리고 낭만이었던 때. 퇴사한 지 20년도 더 넘었지만 아직도 호진 씨를 불러내주는, 이제는 정말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그들과 그들을 만나기 위해 왕복 네 시간도 더 걸리는 의정부행 지하철을 타는 환갑이 넘은 막내 호진 씨. 이들의 비하인드를 들으니 호진 씨의 의정부행이 나에겐 그저 청춘스럽게만 보인다. 그리고 난 이제 지하철을 타고 오며 가며 스치는 호진 씨 또래의 사람들을 보며 괜히 그들의 청춘을 남몰래 상상해보곤 한다. 그 누구에게든 그 시절 청춘이 있음을. 세상에 아무리 치인들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들을 살아가게 하는 그 시절 낭만이 한편에 자리하고 있음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