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어난 인연

by 안부시인 김선순

아주 오래전 지혜의 숲에서 한 아이를 만났다. 이름은 수연이었다. 갓 사춘기를 맞이한 그 아이는 혼란과 고민 속에 있었고, 나는 선생님의 자리에서 그 시절을 함께 건너는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만날 때마다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어루만지며 함께 나아갔다. 그때의 무기는 기다림이었던 것 같다.

3년 남짓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나는 아이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의 힘을 조금씩 길러가도록 도왔다. "넌 이런 점이 참 멋져!" "그건 네가 가진 특별한 힘이야"라고 말해주며, 아이가 자신 안에 가능성을 보도록 거울이 되어주었다. 모든 사람이 모든 능력을 가질 수는 없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빛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자신의 힘은 작게 느끼고 남의 것은 크게만 보게 된다. 그 비교의 그늘 속에서 자신을 깎아내리고 움츠러들고 우울해진다. 그럴 때일수록 아이레게 말해주었다. "진짜 나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법은 내가 가진 힘에 집중하는 거란다"

아이와 함께 나눈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물었다. "너는 무엇을 할 때 힘이 나니?" "무엇을 하면 즐겁니?" "어떤 일을 해보고 싶니?" 그렇게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답을 찾게 했다.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며 감탄하곤 했다. "와우 이 그림 멋진데, " 칭찬은 아이의 마음에 씨앗처럼 뿌려졌고, 언젠가 피어날 꽃을 기다렸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점점 흐려지던 어느 날 문득 선명하게 떠올랐다. 당진문학제의 현장에서였다.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선생님, 저 누군지 아세요?" 돌아보니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수연이예요" 순식간에 시간의 강을 건너 기억이 되살아났다. 우리는 따뜻한 안부를 주고받으며 그 아이의 현재를 들었다.

놀랍게도 이제는 대학생이 되었고, 웹툰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수줍게 말했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그 한마디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 아이의 삶에 내가 조금이라도 빛이 되었던 걸까. 그렇게 살아온 시간들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는 것 같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다양한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흔들리기도 하지만, 이런 만남들이 내게 말해준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지를, 그 과거의 기억 하나가 오늘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든다.

짧은 만남이 아쉬웠던 다음 날, 또 하나의 반가운 소식이 찾아왔다. 수연이 엄마와 통화를 하게 된 것이다. 한참을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랬다. "선생님 그때는 어찌 알았겠어요, 우리 수연이가 대학생이 될 거라는 걸요. 생각도 못했던 거 같아요. 지금 너무 좋아요." 목소리 너머로 전해지는 어머니의 감동에 나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때 선생님이 수연이에게 자신감 주시고 표현하는 법을 알려줘서 지금은 사람들 앞에서도 잘하고 있어요"라며 연신 고맙다는 그녀의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삶의 순간마다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스쳐 지나는 사람도 있고, 한동안 머물며 관계를 맺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만남의 길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만남이 서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주고받는 영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나를 만들어준 사람들이 이었듯, 나 또한 누군가의 삶에 작은 울림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진심 어린 말 한마디, 따뜻한 응원이 누군가의 삶에 단단한 뿌리가 되어주었다는 사실. 인연 속에서 다시 이름으로 만나는 그 순간,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 웃을 수 있다면 우리는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만남들이 오늘을 걸어가는 나의 이유이고 삶의 깊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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