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살 때의 기억이 하나 있다. 엄마 아빠의 관심이 받고 싶었던 나는 밥상 앞에서 팔다리를 휘적이다가 미역국을 무릎에 쏟았다. 아빠는 그 모습을 보고 왜 이리 덤벙대냐며 처음으로 나에게 화를 냈다. 장난 많고 늘 웃어주던 아빠가 처음으로 나에게 화를 낸 순간이어서 아주 어릴적 기억이지만 선명하다.
아빠는 화를 낼 때 처음 보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 거친 말을 하며 화를 낸다. 어린 나는 아빠의 호통이 너무 무섭고, 아빠가 나를 외면하는 게 두려워서 어떻게든 아빠의 마음에 드는 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중고등학생이 되어 성적으로 아빠 맘에 드는 딸이 되기는 참 쉽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낮은 성적표를 들고 간 나에게 아빠는 또 다시 심한 호통을 쳤다. “나중에 그저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어?” “난 너가 그렇게 살면 지금만큼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어.” 나는 아빠를 내 가치를 정해주는 사람으로 여겼다. 모든 선택 앞에서 아빠의 눈치를 봤고, 아빠의 칭찬을 받기 위해 애를 썼다.
나는 대학교 3학년 때 변호사라는 꿈을 꿨다. 그러나 참 쉽지 않았다. 1년에 1번 있는 시험을 3번이나 시도했지만 시험 점수가 계속 낮게 나오면서 자신감을 잃었고, 더 이상 공부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나는 결국 이 꿈을 여기서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취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취업은 꼭 서울로 하고 싶었다. 부모님과 살던 수원에서는 출퇴근이 너무 힘들다고 취업을 핑계 삼아 독립을 하고 싶었다.
독립을 하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내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아빠의 영향을 더이상 받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의 목소리에서 벗어나 내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내 인생을 살고 싶었다. 독립을 하면서 아빠의 목소리를 잠시 외면할 수 있었다. 회사를 2년 동안 다니면서도 아빠에게 꿈을 포기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아빠는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계속 시험을 준비하는 줄 알고 있었다. 아빠가 그렇게 기대하던 변호사라는 꿈을 포기했다고 이야기하면 아빠가 나를 따뜻하게 봐주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다. 다시 어린 시절의 나처럼 아빠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빨리 아빠에게 이야기해야 내 미래가 선명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내가 재밌어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앞으로 내가 할 일을 더 찾아가고 싶다는 내 소망에 당당해지고 싶었다. 어느 날 갑자기 용기가 생겨 드디어 말을 하려고 아빠 앞에 섰는데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다. 여기까지 오는 게 뭐가 그리 힘들었을까, 내가 내 인생 살겠다는데 왜 이렇게 긴장하며 허락까지 받아야 하는걸까. 그런 억울한 눈물이었던 거 같다. 내 눈물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던 건지 아빠에게는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그동안 힘들었지, 내가 너한테 너무 압박을 줬나 보다.” 내 인생이니 원하는 대로 살라고 하셨다. 내가 예상한 아빠의 반응이 아니었다. 내 시나리오는 아빠가 결사반대를 하고 나에게 또 호통을 치시면 용기 내어 내 의견을 강하게 얘기하고 이 영향의 고리를 끊어내려고 했는데.. 허무하다.
어린 시절에 아빠의 영향을 받아 마음이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나를 불안하게 했던건 사실 아빠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안의 목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아빠의 호통을 내 안에 담아 아빠의 목소리인 척 내 목소리로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나쁜 아빠로 그려내고 있던건 아니었을까? 내가 내 선택에 눈치를 봤던 것은 어쩌면 내가 나를 믿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저 아빠는 좋은 핑곗거리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