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어긴 사랑, 세상을 흔들다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의 첫 번째(전야) '라인의 황금'에서 이미 결론을 내렸다. 황금은 사랑을 포기한 자의 것이 되며, 권력은 거짓 위에 서있고, 신들조차 자신이 만든 법의 노예가 된다는 결론이다. 이미 비극처럼 보여지지만 아직 비극이 오긴 전의 세계를 설명한다. 진짜 비극은 지금부터다.
이 작품에는 인간의 고통은 아직 없다. 복잡한 구조 속에 잠복해 있을 뿐, 감정의 형태로 폭발하지 않는다. 신들의 계약으로 설계된 세계가 인간으로 적용되어 충돌할 때 어떤 충격을 가지게 되는지 보여준다.
링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인 '발퀴레'의 첫 장면에서 등장하는 지크문트와 지클린데는 도망자이며, 억압받는 자들이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인간들이다. 이들의 사랑은 '라인의 황금'에서 사라졌던 '사랑'을 소환한다. 그들은 근친이란 이유로 금지된 사랑을 하지만, 바그너는 이를 타락이 아니라 진실의 회복으로 말한다. 법은 어기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사랑 앞에서 가장 큰 균열을 겪는 인물은 보탄이다. '라인의 황금'에서 그는 세계를 설계한 신이었지만, '발퀴레'에서는 그 설계의 포로가 된다. 보탄은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반지를 되찾고 싶어 하고,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서 세계를 구원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립할 수 없는 욕망이다. 법으로 유지되는 세계에서는 법을 초월한 구원이 발생할 수 없다. 보탄의 비극은 악이 아니라, 자기모순이다. 그는 자신의 체계가 낳은 결과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 보탄은 법과 조직, 알고리즘과 시스템으로 본다면 권력은 법을 만들지만 그 법 뒤에 숨는다. 이것이 비극이 시작이다.
이 지점에서 브륀힐데(보탄의 딸)가 등장한다. 그녀는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였지만, 인간의 사랑을 목격한 순간 흔들린다. 지크문트와 지클린데의 선택 앞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질문한다. 법은 옳지만, 그것이 정의인가. 그리고 그녀는 명령이 아니라 연민을 택한다. 이 선택은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연민을 고려하도록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브륀힐데의 선택은 신화 속 사건이 아니라, 윤리(양심)의 탄생이다. 지금의 시대에도 양심은 늘 위험한 선택이다.
보탄이 브륀힐데를 벌하는 장면은 '발퀴레'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다. 그는 딸을 처벌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꿈꿔온 세계를 불태운다. 불의 고리 속에 잠든 브륀힐데는 추방당한 신이자,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다. 이 장면에서 분명해진다. 구원은 더 이상 신들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것은 체계 밖,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에게로 미뤄진다.
'라인의 황금'이 세계의 잘못된 설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발퀴레'는 그 설계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권력은 사랑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했고, 그 대가는 인간의 비극이었다. 바그너는 이 두 작품을 통해 말한다. 세계를 유지하는 법과 계약이 완벽할수록, 인간은 그 안에서 숨 쉴 수 없어진다. 그래서 '발퀴레'는 지금도 불편하다. 어쩌면 세상은 악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잘 작동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닐까?사랑은 비합리적이고 사적인 영역일까? 효율과 생산성으로만 작동하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 아닐까?
'발퀴레'는 영웅을 찬양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우리가 지키는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정말 필요가 없는걸까? 이 질문은 신화를 넘어 오늘의 세계를 향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끝나지 않는 한, 바그너의 반지는 여전히 현재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