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느림, 침묵, 기다림.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조용히 사라진 것은 부끄러움일지 모른다.
부끄러움은 흔히 약함으로 오해된다. 얼굴을 붉히고, 말을 멈추고, 시선을 피하는 태도. 현대 사회는 이를 자신감의 결핍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당당해야 하고, 주저하지 말아야 하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소심함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며 스스로를 성찰하는 능력이다. 법 이전에 작동하는 윤리적 감각, 외적 처벌이 아니라 내적 기준에 의해 자신을 멈추게 하는 힘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이도스(aidos)’는 단순한 수치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절제하게 만드는 덕목이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부끄러움은 도덕의 출발점이었다. 맹자가 말한 수오지심, 즉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씨앗이었다. 부끄러움은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감정이 아니라,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 감각은 예술에서 깊이를 만들어왔다. 고대 비극의 주인공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순간 비로소 비극적 존재가 된다.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른 것은 처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데서 오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 감정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인간이 스스로를 직면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언제나 드러냄과 가림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왔다. 모든 고백이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어디서 멈출 것인가. 그 경계에서 부끄러움은 예술을 얕은 자극으로부터 지켜왔다.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법적 책임과 도덕적 부끄러움은 동일하지 않다. 위법이 아니어도 부끄러울 수 있다. 과거의 정치 문화에서는 명예와 수치의 감각이 지도자의 행동을 규율했다. 그러나 오늘날 책임은 종종 법적 판단으로만 축소된다. “불법이 아니다”라는 말은 면죄부가 된다. 부끄러움이 사라진 정치에서는 사과가 전략이 되고, 인정은 계산이 된다. 그 결과 공동체의 신뢰는 약화된다. 부끄러움은 권력을 약하게 만드는 감정이 아니라, 권력을 스스로 절제하게 만드는 장치다.
디지털 시대는 이 감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노출되고, 동시에 타인을 노출시킨다. 사적인 경험은 콘텐츠가 되고, 실수는 기록으로 남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시적 공개는 부끄러움을 강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을 둔화시킨다. 모두가 말하는 공간에서는 아무도 멈추지 않는다. 부끄러움은 잠시 침묵하는 감정인데, 속도의 체계는 그 침묵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반성하기 전에 해명하고, 사과하기 전에 방어한다.
부끄러움이 사라질수록 사회는 더 많은 규칙을 요구한다. 외적 통제는 늘어나지만 내적 절제는 약화된다. 법은 촘촘해지지만 신뢰는 얇아진다. 공동체는 제도로 유지될 수 있지만, 품격은 감정으로 유지된다. 그 감정이 바로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은 인간을 위축시키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수정의 가능성이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인식,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는 능력,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태도. 이 감각이 있을 때 예술은 깊어지고, 정치는 책임을 갖게 되며, 디지털 공간은 덜 잔혹해진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멈춤이다. 얼굴이 붉어질 줄 아는 사회, “내가 지나쳤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 잠시 말을 고르는 사회. 그곳에서 인간은 다시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
부끄러움은 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