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사주를 같이 배우는 친구가 어젯밤 포켓몬이 되는 꿈을 꿨다고 했다. 한참 사주 과몰입 중인 나는 친구가 포켓몬이 되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선생님은 임수 일간이니 가랴도스 정도 되나요?” 하다가 ‘을목 일간인 나는 어떤 포켓몬일까?’ 진지하게 고민하느라 오전을 침대에서 보냈다.
을목인간이 포켓몬이라면?! 좋아~ 너로 정했다!
‘임수’는 무엇이고, ‘을목’은 무엇인가. 만세력 사이트에서 태어난 년/월/일/시를 입력하면 4개의 기둥과 8개의 글자가 나타나는데, 왼쪽에서 두 번째 기둥이 일주이다. 윗줄은 ‘천간’이라 하고, 아랫줄은 ‘지지’라고 한다. 천간은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 이렇게 10글자이고, 지지는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 12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어딘가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한 글자들은 ‘목, 화, 토, 금, 수’라는 오행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또 음양에 따라 나뉜다. 이렇게 스물두 개의 글자 중 여덟 글자를 태어난 일시에 따라 배치되는 것이 사주팔자이고, 내가 가진 여덟 글자가 내가 어떻게 생긴 지를 보여주는 ‘사주원국’, 즉 나의 나라다.
내가 친구에게 사주 배우기를 영업당한 것도 바로 이 설명을 들은 후였는데, 일단 사주가 네 개의 기둥이고 팔자가 여덟 개의 글자라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 뭔가 굉장히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관이 있었단 말인가! 아무튼 이 여덟 개의 사주 원국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글자, 나를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일간’이다. 일반적으로 일간을 말할 때는 천간에 오행을 붙여서 말한다. 을목, 임수, 신금과 같이... 있어빌리티가 폭발한다.
(*나의 일간을 확인하고 싶다면 만세력 사이트에 생년월시를 입력하고, 위에서 두 번째 줄에 있는 글자를 보면 된다)
나는 ‘을목(乙木)’ 일간이다. 나무긴 나무인데 ‘음’인 나무여서 ‘양’의 나무인 ‘갑목’이 뿌리 깊고 단단하고 큰 나무라면, 나는 한들한들 휘청이는 작은 꽃나무랄까(저기 모에화 아닙니다). 이렇게 같은 오행의 속성이라도 음양에 따라서 성향이 달라질 수 있다. ‘병화’가 태양처럼 빛난다면, ‘정화’는 촛불처럼 어둠을 밝힌다던지, ‘임수’가 깊고 차가운 바닷물이라면, ‘계수’는 졸졸졸 계곡을 흐르는 맑은 시냇물인 것이다. 어쩐지 ‘계수’인 친구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이것저것 하더라니!! ‘병화’인 친구들은 따듯한 오지라퍼들이고 말이다.
‘을목’인 나는 살아있는 풀이라서 자꾸만 성장하고 싶어 하고 쓰임이 있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내가 자꾸만 자격증을 따는구나. 덩굴처럼 이것저것 계속해서 확장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내가 취미만 백 만개로구나. 연약해 보이지만 잡초처럼 끈질기다. 그래서 내가 부루마불이나 고스톱 칠 대 몇 번이나 오링날 위기를 견디고 부활하는구나!! 사주선생님 왈, 큰 나무 열매들은 사과, 감처럼 주먹만 하지만 사람 머리만 한 호박, 수박은 덩굴에서 열린다고 하셨다. 그래서 제가 소소한 행복 아닌 크고 확실한 한탕주의인 것인가요!!
글자 하나만으로도 꼬리에 꼬리는 무는 ‘자캐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주의 매력. 게다가 이제 ‘일간’이 관심을 두는 환경인 ‘일지’, 일주의 아랫 글자를 함께 보면 캐릭터 해석은 더욱 풍부해진다. 이것이 바로 MBTI는 울고 갈 육십 일주다. 나의 일지는 ‘사화(巳火)’인데, 말 그대로 활활 타는 불이다. 나는 나무인데 불 위에 있어. 아, 그래서 내가 ‘발등의 불’ 상황이 될 때까지 미루고 미루는 것인가? 친구는 ‘임신(壬申)’ 일주인데, 타닥 타박 불타고 있는 나와는 달리 금이 물을 맑게 해주는 형국이다. 그래서인지 늘 뒷배가 있는 것처럼 느긋하고 똑똑한 친구를 나는 ‘옥정수기’라고 부른다. 미네랄 필터를 장착하고 태어난 깊은 물 같은 녀석.
남편의 일주는 ‘신사(辛巳)’일주. 사주선생님은 한 마디로 내 남편을 파악하셨다. “화려한 조명이 나를 비추네”. 초연한 척 점잖게 있지만, 실은 누구보다 인싸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천간인 신금은 반짝반짝 보석같이 제련된 예리한 금이고, 지지가 사화여서 불빛이 조명처럼 보석을 비추는 형국이라나. 아니, 7년 산 저보다 글자 한번 본 사주선생님이 남편을 꿰뚫는 한 마디를 하시다니. 이것이 핵심을 찌르는 카피인가요?
사주를 배우다 보면 정말 생긴 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의 생김을 잘 알려주기 때문이다. 한 글자 한 글자 키워드가 던져질 때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어떤 느낌인지 알겠어!라는 느낌이랄까. 올리브영의 화장품 용기에 붙어있는 해시태그, 펫네임 같다고나 할까? #물복립 이것만 봐도 수채화 발색의 은은한 복숭아빛 맑은 컬러의 촉촉한 제형의 립스틱 같은 느낌이 오듯이 말이다.
어릴 적 ‘늑대와 함께 춤을’ 영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서 친구들과 서로의 인디언식 이름을 지어주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일주와 그 물상이 나타내는 그림들은 마치 인디언식 이름 같다. 주변 친구들의 일주를 보며, 하나씩 마음으로 해시태그를 붙여준다. #발등의불 이 #옥정수기 친구를 만나 안정을 찾기도 하고, #화려한조명이나를비추는 남편을 만나 숨겨진 인싸욕구를 오구오구 해주기도 하며, #이슬맞으며일하는소 친구에겐 커피 쿠폰을 보내며 한숨 돌리길 바라고, #바다위의풀 에게는 따뜻한 위로를 건네며 닻이 되어주고 싶다. 친구들이 생긴대로 사는 것을 바라면서 지켜보는 나만의 작은 응원법이랄까. 우리는 그냥 그렇게 생겼고,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