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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과 단감 Oct 22. 2023

상암동 박도사의 영업 비밀

당분간은 지인들만 사주 봐드립니다

심리학을 전공한다고 했을 때 제일 자주 들었던 말은 ‘나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맞춰봐’였다. 심리학은 관심법도 아닌 데다가 그걸 맞춰도 뭐 어쩔 건가 싶었지만, 같은 질문을 수십 번씩 듣고 다양하게 대꾸해 본 뒤  ‘지금 내가 네 마음 설마 맞출까 싶지!?’라는 방법으로 정착했다. 저 대답이면 모두 함께 하하하 웃으며 자연스럽게 다음 대화로 넘어갈 수 있었다.  


사주를 배운다고 하면 제일 많이 듣는 말은 역시 ‘나도 사주 봐줘!’라는 말이다. 좋은 사주라고 대충 얼버무리고 웃으며 넘어가고 싶지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맞춰보라고 할 땐 다들 그냥 대충 넘어가더니 사주에는 왜 이렇게 다들 진심인지… 그냥 좋다고만 해도 어떻게 좋은 건데, 뭐가 좋은 건데라고 추궁을 시작한다. '결혼운은 좋아?' '자식운은 좋아?' 구체적으로 물어보면 점점 더 곤란해진다.  


사주에 이미 다 쓰여 있다고는 하지만

친구들의 닦달에 이기지 못하고 사주를 보기 위해서 만세력 어플을 켜고, 한자를 받아 적기 시작하면 다들 ‘우와~’하는 반응부터 터져 나온다. 한자를 쓰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구들은 내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줄 알고 환호를 해준다. 사실은 생년월일을 만세력으로 옮겨 적는 것일 뿐이다. 음력 8월 15일이 양력으로는 며칠인지 확인하듯이 만세력의 언어로 생년, 월, 일, 시를 ‘계묘년, 임술월, 계축일, 신사시로 바꿔 적고 있는 것뿐이다.


한자를 옮겨 적고 나면 이제 이 글자들이 가지고 있는 단서를 열심히 발굴해 내야 한다. 내가 가진 글자들이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를 기반으로 글자끼리 서로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십성) 대운이 어떻게 들어오는지를 확인하고, 또 살이나 운성 같은 다양한 내용들을 확인한다. 십성이니 대운이니 살이니 하는 것들은 다 계산이 필요한 일인데, 이미 만세력 사이트나 어플에서 알아서 다 계산을 해서 이미 다 이것도 알려준다.


구체적 스토리라인을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

그럼 어플이 사주를 다 봐준 것 아닌가 싶지만, 어플이 미리 계산하여 찾아준 단서를 잘 모아서 맥락을 가지고 해석을 하는 것부터가 인간의 일이다. 사주를 배우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사주 속에는 결혼 이사 승진 같이 내 인생의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예언서처럼 적혀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공부한 수준에서 사주는 구구절절 쓰여있는 예언서가 아니라 각각의 단서만 나열된 커닝 페이퍼 같다. ‘넌 뭐 대충 이런 캐릭터를 가지고 있고…. 음 대강 이 정도의 타임라인에 이런 느낌 혹은? 기운? 혹은 바이브 뭐 대충 뭐 이런 것들이 오겠는걸??'  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운이라는 것도 생각보다 구체적이지 않다. '문서운'이라는 것이 들어와도 이 문서운을 계약을 하는 운으로 해석을 하기도 하고 공부를 하는 운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 경험이 많고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라면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 운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낼 수 있겠지만, 공부가 얕은 나는 이 문서운이 어떻게 쓰일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듣고 싶은 말은 정해져 있으니까

아직 나는 사주를 보는 것이 아직 너무 어렵다. '승진…? 이때 관운이 들어오긴 하는데 그게 승진일지는 모르겠고 … ‘이사? 가도 되고 아님 말고…’라고 대답할 순 없다.  사주 여덟 글자를 한자로 쓰는 순간부터 한껏 기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완전히 실망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미 알고 있던 지인의 특성을 때려 넣어 사주가 준 단서들 사이의 공백을 메꿔 넣어 보기로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미 남의 말에 잘 휘둘리는 얇은 귀를 가진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 친구에게 역마살이 들어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뭔가 네가 자리를 옮기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 그러면 열명 중 아홉 명은 깜짝 놀란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주의 단서를 약간 곁들였을 뿐이지만, 지인들은 내가 사주를 통해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얼레벌레 사주를 봐줬는데 지인이 지인에게 소문을 내고, 자꾸 소문을 듣고 오는 사주를 들이미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나의 지인들이 원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고, 돈을 잘 벌고 싶고, 지금보다 잘 살고 싶다. 그래서 요즘 나는 친구들이 사주를 봐달라고 하면, 원하는 말을 해주기 위하여 사주에서 그 단서를 찾아낸다. ‘너는 정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훌륭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어’ , ‘너는 식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속 잘 먹고 잘 살 거야.’라는 식이다. 이미 내가 경험으로 알고 있는 특성이지만, 사주라는 수단을 쓰면 갑자기 구체적이고 근거가 있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은 ’ 응 그래 맞아 너 좋은 사주야~’라고 대책 없이 말해주는 것뿐인데, 이러나저러나 결국엔 지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게 무슨 사주 풀이인가 싶지만, 공부가 얕은 꼬꼬마 사주인에게는 당분간은 유효한 방식일 것 같다.


by 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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