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나의 오른쪽 정강이에는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렸을 적 낫으로 나무를 베는 과정에서 한쪽손으로 나무를 잡고 낫질을 해야 했는데 그냥 낫질을 하니 나무가 굽어지면서 그대로 나의 무릎으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때 당시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어떻게 극복했는지 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밖에도 몸 이곳저곳에 작은 상처의 흔적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상처의 흔적들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잊고 살았다.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띄는 경우라도 별다른 의미는 부여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데 지금 언급하고 있는 상처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외부적 상처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여기까지 오면서 우리가 받아야 했던 마음의 상처와 그 치료를 위한 과정을 얼마나 거쳐왔는지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고 앞으로의 삶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의 문을 열어보고자 한다.
의사는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건강하게 지켜나갈 수 있다. 상처를 치료해줄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도 있다. 그리고 이 상처는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 할지라도 치료해 줄 수 없다. 나는 의사가 아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치료해 줄 수가 없다. 의사면허가 없기도 하지만 나 자신의 상처를 보살피기에도 버거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도록 노력을 하자. 그렇게 상처에 새살이 돋아날 수 있도록 잠시만 시간을 주자"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어느 오래된 드라마 대사에 사고의 문이 열림을 느껴본다. 우리는 지금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만 조금만 여유를 갖고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살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것으로 인식했다. 비록 의사면허는 없지만 그래서 외적인 병은 진료할 수 없지만 마음의 상처를 보살펴 줄 수 있는 면허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상처를 입고 있지만 그럼에도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살펴 줄 수 있는 치유자가 되자는 대사에서 나는 지금 나 자신의 상처에도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상처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를 자문하면서 나의 상처는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임을 각인하게 된다.
상처를 받으면서 힘들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잘 해보고자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맞지 않게 돌아가는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좌절에 빠지게 된다. 드라마의 주인공도 세상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안고 절망에 빠져있는 이에게 지금 상처의 경험으로 세상을 치유하는 의사가 돼 보자고 위로해 주는 장면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만 상처는 그저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내라는 단어는 희망이 보이기 때문에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저 산만 넘으면 희망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리고 그 희망이 현실로 되면서 인내의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산을 넘기 위하여 깨지고 긁힌 상처는 흉터로 남게 되고 우리는 그 상처를 영광이나 소중한 경험으로 포장해 버란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지워버린다.
상처는 잊어버리고 지워버린다고 해서 잊혀지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상처 덕분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고 그 상처 때문에 더 큰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상처를 다른 사람들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처방전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의사가 될 수 있도록 면허를 취득하는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각박한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그런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우리다.
상처는 완쾌가 없다. 그렇다고 전염성도 없다. 그리고 그 처방전의 유효기간도 기한이 없다. 상처는 상처로 치료해야한다. 의학서적에도 나와있지 않는 최고의 명약이 같은 상처를 안고 있는 상대방이다. 서로에게 치료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보자. 그리고 실험해 보자. 병은 널리 알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 병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해서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말들을 하지만 이는 극히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말이다. 자기가 알아서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는 나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포기해 버리는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체면이라는것을 목숨처럼 여기는 문화 속에서 자신의 병들고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데서 나오는 말이다. 겁나고 힘들어도 상대방의 도움을 청하는 것을 꺼려한다. 참을 인(忍) 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상대방과 이 불화를 더 크게 만들지 말자는 의미지만 우리는 이것마저도 자신의 체면치레에 사용하고 있다. "화병"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에 밖에 없다고 한다. 참는 것이 미덕이라는 말을 진리로 여기고 살아온 결과물인 것이다. 무조건이라는 단어는 현대사회에서는 부합리한 단어이다. 세상은 원인과 결과가 있고 과정을 거쳐야 도출되는 흐름을 갖고 있다. 과거의 세상도 그랬고 지금의 세상도 그러고 앞으로의 세상도 그럴 것이다. 자신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조건도 달라져야 한다. 과정을 수행하는 방법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들어진 길위를 걸어가는 것은 안전하고 쉽지만 참아야 한다. 이미 정해진 조건에 따라야 한다. 그래서 참아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간다면 불안함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참지 않아도 된다. 상처는 입겠지만 상처를 치유해 주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이다. 상처를 안고 있지만 나의 상처가 상대방을 치유해 주고 그의 상처가 나의 처방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상처에 새살이 돋아날 것이고 그때까지 우리는 시간을 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