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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Feb 19. 2024

다이어트에서 해방되기_다이어트, E부터 H까지

먹는다는 것, 그 위대한 행위

※ 시작 전 당부의 말씀

 [다이어트 A부터 D까지]를 먼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E. 결과는?]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큰 날일수록 마치 보상처럼 나는 더 짜고, 더 맵고, 더 단 음식을 찾았다. 첫 입을 씹어 삼킬 때의 그 황홀한 쾌감. 그러나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나면 기분 좋은 배부름이 아니라 불쾌한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밥상 위 먹다 남은 음식물과 일회용품 쓰레기가 꼭 나 같았다. 나도 그렇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날은 먹는 양도 자제가 안되어 과식을 하기 일쑤였다. 마치 동물처럼 음식을 먹어댔다고 생각하면(대부분의 동물들은 먹을 만큼만 지혜롭게 먹으니 적절한 비유는 아니다.) 식사 후의 고요함 속에서 자괴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방금 먹은 음식이 곧바로 살이 되어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상상을 하며 그렇게 한참을 자괴감의 바다에서 헤엄치다 '이제 이렇게 살지 말자.' 생각하며 내 안의 의지와 긍정의 기운을 겨우 쥐어짜 내보지만 다음 날은 어제 먹지 않은 메뉴를 시켜 먹을 뿐 일상은 도돌이표였다. 그때는 그랬다. 먹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 지 몰랐다. 내가 받는 스트레스의 크기만큼의 자극적인 음식으로 그것을 해소하려고 했다. 먹으면 잠깐은 기분이 좋아지니까. 그러나 쾌감은 잠시, 우울함은 살과 손을 잡고 찾아왔고 나는 인생 최고 몸무게를 경신했다.


[F. 다이어트 = 고통?]

 살이 찌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살을 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다이어트를 상상하면 떠오르는 숨찬 유산소 운동, 죽을 것 같은 근력 운동, 굶주림. 살을 뺀다는 것은 고통을 떠오르게 한다. 도대체 왜일까. 다이어트는 본래 식이요법을 뜻하는 말인데(자세한 내용은 [B: Diet의 기원을 찾아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말이다.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건강한 몸'이 아니라 '날씬한 몸'을 가지고 싶어 하니까. 정확히 말하는 날씬한 몸이 아니라 '이상적인 몸' 말이다. 인간 문화의 허리 잘록, 다리 날씬, 뱃살 없음(또는 단단한 장딴지, 쪼개진 복근 같은 것) 같은 이상적인 몸 추구가 우리의 건강한 몸에 대한 생각을 더 혼란스럽게 한다. '웬만한 노력으로는 저런 몸을 만들 수 없어!', '아주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할 거 같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이다.  나는 자제력이 없고, 조절력도 없으며, 저런 고통을 감수할 만한 인내력과 강인함도 없다는 자괴감은 덤이다.

 하지만 다이어트는 고통이 아니다. 사회적 규격에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이상적인 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요받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것이고, 그렇게 될 수 없어 고통스러운 것이다. 


[G.  그래서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원칙은 단순하다. '나를 위한 음식을 먹는 것.' 나를 위해 아이스크림을 한 통을 앉은자리에서 때려먹던 

 나이지만 '나' 앞에 한 가지 전제를 더 추가하니 원칙은 더욱 단순해졌다. '사랑하는, 귀한 나를 위한 음식을 먹는 것.' 끝이다. 이 전제 위에서는 많은 것들이 단순해진다.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는 음식을 줄이기, 내가 불편해질 정도의 양은 먹지 않기, 나에게 맞는 음식과 맞지 않는 음식이 어떤 것인지 알고 먹기 같은 것들 말이다. 몸에 받지도 않는 것을 관성처럼 먹었단 생각이 들고 술을 끊었다. 공산품을 많이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햄이나 소시지 대신 고기를 먹었다. 매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속이 쓰리고 몸이 아팠었기 때문에 매운 음식을 줄였다.

 원칙은 단순하다. 나를 중심에 세우기. 그리고 먹는 행위를 하기 전에는 나를 생각하기. 내가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이 우선이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맑은 정신과 맑은 몸이었다.


[H. 말이 쉽지]

 단순한 원칙만큼 실천도 쉬울까? 아니다. 나는 여전히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 짜고 단 것을 입 안에 욱여넣을 때가 있다. 밥을 차리지조차 않고 겉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서서 음식을 욱여넣은 적도 있다. 하지만 먹는 행위를 하기 바로 직전까지 고민하려고 한다. 지금 내 입에 들어가는 이 음식을 나에게 주어도 될지 말이다. 

 사실 나는 이를 어렵게 하는 데는 미디어의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푸드 포르노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는데, 그 말을 듣고는 정말 크게 공감했었다. 단순히 미디어에서 먹는 장면을 많이 보여줘서 문제라기보다는 먹는 행위의 본질을 담지 못한 콘텐츠들이 많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먹는 행위는 대부분 자본주의의 원칙에 따라 흘러간다. 어떤 음식(방송)이든 결국 팔아야 하는 사람이 있고, 우리가 그것을 많이 소비할수록 누군가는 이득을 보게 되어있다. (이걸 먹으면~ 저걸 먹으면 병이 낫는대요~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살쪄서 우울해하던, 당뇨나 고혈압으로 건강을 잃던 개의치 않는다.

 어디서도 먹는 행위의 그 위대한 본질을 알려주지 않는다. 먹는다는 것은 위대한 행위이다. 나의 몸을 움직이게 하고, 내가 사고하게 하는 행위이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의 원천, 시작점이 바로 먹는 행위이다. 먹지 못하는 죽는 이유가 바로 그래서가 아닐까. 그만큼 중요한 행위를 나는 너무 생각 없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아니,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 

  지금 입으로 들어와 내가 씹어 삼키고 나의 피와 살을 만들고 나를 생각하고 말하게 하는, 각종 질환의 발병 여부와 시기, 그리고 생명의 기한까지 결정할 있는 음식. 어떤 재료로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무슨 성분이 들어있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진정 나를 위한 음식일까?



PS. 그래서 음식 가지고 장난치는 모든 사람/기업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다. 이런 장난을 치는 사람들은 모두 법의 철퇴를 맞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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