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저가 아닌 메시지를 듣고싶어 나는 세바시 강연을 들으러 자주 간다.
1.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게 자주 세바시 강연을 들으러 가는 이유가 뭐예요?”
나는 조용히 웃는다.
“거기에는 삶이 말이 되는 순간이 있거든요.”
지난 1년간 열 번.
나는 세바시 강연장 한쪽 방청석에 앉아, 말이라는 옷을 입은 삶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강연자’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섰지만, 내겐 ‘삶의 목격자’로 다가왔다.
2.
메신저가 아닌, 메시지를 주는 사람들
내가 이 무대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그곳에는 ‘메신저’가 아닌 ‘메시지를 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메신저는 남의 말을 잘 정리해 전한다.
메시지를 주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쥐어짜서 꺼낸다.
전자는 중립적이고 안전하다.
후자는 책임지고 흔들린다.
그들의 말은 때론 울퉁불퉁하고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진짜였다.
나는 그런 ‘살아 있는 메시지’를 좋아한다.
그건 책에서도, 검색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니까.
3.
울림은 스스로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강연장에서 매번 질문을 받는다.
하지만 그 질문은 강연자가 내게 던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나에게 묻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메시지를 살고 있는가?”
“당신의 말은 경험에서 왔는가, 편집된 지식에서 왔는가?”
그 질문은 나를 멈추게 하고, 가다듬게 한다.
그리고 언젠가 내 안의 무언가가 다시 걸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그 울림을 마음의 북소리라 부른다.
그 소리에 이끌려 나는 오늘도 살아있는 질문을 찾아간다.
4.
삶의 메시지를 쓰는 사람으로
세바시를 다녀오면,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그냥, 내 삶을 읽고 싶어서다.
내가 걸어온 길이 어떤 문장을 만들었는지,
그 문장이 어떤 질문을 품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다.
그래서 나는 ‘글 쓰는 기술사’가 되었다.
기술과 사람, 경험과 철학 사이의 다리를 놓는 사람.
‘낭만기술사’라는 이름이 그때부터 나에게 맞는 옷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SNS에 올린 짧은 단상들,
책에서 밑줄 그었던 문장들,
현장에서 부딪히며 배운 기술자의 일기들.
그 모든 것이 한 문장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나 역시 누군가의 삶에 메시지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5.
메시지를 살아가는 삶
나는 여전히 기술자로 살아간다.
PM으로서 팀을 조율하고, 리더로서 후배들과 점심 식탁에서 세상의 방향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모든 일상 속에 하나의 공통된 질문이 흐른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메시지를 살고 있는가?”
그 질문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방향은 있다.
그 방향을 따라, 나는 오늘도 한 줄의 글을 쓰고, 한 사람의 마음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