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프랑크부르크.
뢰머 광장은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아직 한산했다.
동양인 남성과 서양인 여성이 뢰머 광장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둘기 몇 마리가 주위를 서성일뿐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박사님. 이 사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세요.”
셀레나가 요환에게 사진 몇 장을 건네었다.
사진 안에는 CCTV로 촬영한 중년 남성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요환은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확실해요. 바이트만 박사님이 틀림없어요.”
사진 안에 있는 인물은 헤드마스터 박사 중 한 명인 독일인 바이트만이었다.
바벨의 후예에서 나온 후 그는 자신의 조국에서 은신 중이었다.
“그런데 셀레나, 어떻게 그가 프랑크부르크에 있다는 것을 알았죠?”
요환의 질문에 셀레나는 미소를 지었다.
셀레나는 사진들을 뒤적거리더니 한 사진을 집어 요환에게 보여주었다.
“저희 측 직원들을 너무 얕보는군요. 여기 이 사진을 보세요.”
요환은 셀레나가 준 사진을 보았다. 사진 안에는 높은 고층 빌딩 앞에서 찍힌 바이트만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이 어디죠?”
셀레나는 손가락으로 사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고층 빌딩 앞에는 유로화를 나타내는 모양의 커다란 간판이 보였다.
“유럽중앙은행이에요.”
“유럽중앙은행?”
셀레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은 독일인인 바이트만이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 예상하고 수사를 진행했죠. 그래서 일단은 독일 내에서 바이트만을 찾아본 것이죠. 저희 쪽 독일지부에 연락하니 쉽게 찾을 수 있더군요.”
요환은 UN의 엄청난 정보력에 감탄한 한편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유럽중앙은행에 볼일이 있었던 것 같군요.”
요환은 짐작 가는 점이 있었다.
“은행이라면 확실히 그렇죠.”
“유럽중앙은행은 일반 은행 업무를 하는 곳이 아닐 텐데요?”
셀레나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이트만 박사는 바벨의 후예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어요. 아마도 바벨의 후예가 흩어진 후 자신이 맡고 있던 돈을 챙기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달러인 돈을 유로로 환전하려고 했겠죠. 그 많은 달러를 시중 은행에서는 유로로 전부 바꾸지 못할 거예요.”
“바벨의 후예가 그렇게 돈이 많나요?”
“아마도요? 저도 어느 정도 있는지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아마 상상 이상일 거예요. 선대 과학자들 때부터 모아둔 돈이 있으니까요. 몇 백 년 동안 바벨의 후예가 이렇게 공중분해 된 적이 없었으니...”
요환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셀레나를 도와 바벨의 후예 일원들을 찾고 있지만, 그 역시 한때 몸담았던 곳이었다.
그 화려했던 바벨탑이 폐허로 변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했다.
“게다가 처음에 제가 말했듯이 그들은 테러조직과 분명 연관이 있어요. 아마도 첨단과학을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팔아 자금을 마련했던 것이 분명해요. 몇 번이나 UN 측에서 꼬리를 잡았으니까요.”
“저도 처음에는 절대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왓슨 박사님도 바벨의 후예 자금에 관련해서는 모두 바이트만 박사에게 맡겼거든요.”
요환의 말에 셀레나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바이트만 박사가 직접 테러조직들과 거래를 했을 가능성도 있겠군요?”
“충분하죠. 저 역시 몰랐으니까요. 아마 왓슨 박사님도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그분은 오직 과학적 실험에만 관심 있는 분이니까요. 바이트만 박사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군요.”
셀레나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요환이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저번 파도바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조심해야 할 것 같네요. 만약 바이트만 박사가 테러조직과 거래하고 있었다면 그 주위에 분명 테러리스트들이 그를 보호해 주고 있을 테니까요.”
셀레나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우리 쪽 정보에 의하면 뢰머 광장에서 이른 아침에 그가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더군요.”
셀레나는 요환에게 후드 지프업 점퍼를 건네주었다.
“우선은 당신 정체를 숨기고 그를 따라가 봐요.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요환 역시 파도바의 사건이 아직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안일한 생각으로 부주의한 탓에 왓슨이 죽는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요환은 셀레나가 준 후드를 입고 모자를 자신의 눈이 가릴 정도로 푹 눌러썼다.
“좋아요. 그렇게 하면 당신인지 모르겠어요. 다만 요환. 당신은 동양인이니까 여기서는 눈에 확 띄어요. 행동을 각별히 조심해야 해요. 어디서 누군가 우리를 또 보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셀레나의 말에 요환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
다시 한번 파도바의 악몽이 떠오르려고 했다.
요환은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돌아보았다.
아직은 평화로운 모습의 뢰머 광장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한두 사람씩 행인들이 광장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길거리 음악가들도 한 둘씩 광장으로 와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요환과 셀레나는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바이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셀레나는 여독이 쌓였는지 피곤한 듯 벤치에 앉아 졸고 있었다.
이탈리아 파도바 사건 이후 요환은 하루 정도 호텔에서 안정을 취했지만, 셀레나는 계속 밖에 나가 있었다.
왓슨 박사의 시신처리와 뒷수습도 도맡아 해준 것이 바로 셀레나였다.
그리고 바이트만 박사가 프랑크부르크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쉴 새 없이 바로 비행기를 타고 이곳까지 날아왔다.
고개를 떨군 채 졸고 있는 셀레나가 안쓰러웠던지 요환은 그의 고개를 자신의 어깨에 갖다 대었다.
셀레나는 요환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편안한 듯 잠을 청했다.
요환은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 셀레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그의 목덜미에 닿으면서 은은한 샴푸향이 퍼졌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적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물론 그녀 덕분에 경찰들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바벨의 후예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그녀에게 적대감이 생겼었다.
하지만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그녀와 함께 다니면서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오랜 동료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고 그 역시도 자신도 모르게 셀레나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아련하게 캐서린 생각이 났다.
캐서린 역시도 그가 힘들 때 항상 옆에 있으면서 그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를 많이 의지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져버렸던 그였다.
‘어쩌면 이 여자도...’
요환도 조용히 셀레나를 바라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상상을 해버렸다.
나쁘지 않은 상상이었다.
그때 요환의 시야에 멀리서 한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요환은 급하게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셀레나를 흔들어 깨웠다.
셀레나는 일어나자마자 자신이 요환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얼굴을 붉혔다.
“미안해요, 요환.”
“아뇨.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저쪽을 봐요.”
요환은 광장 분수 쪽을 가리켰다.
분수 앞에는 한 중년 남성이 어떤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바이트만 박사?”
“맞아요. 셀레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요환은 후드를 더욱 눌러쓰고 지프를 턱까지 올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사실 그와 바이트만 사이는 거리낌이 없는 사이였지만 왠지 모르게 셀레나의 말을 들으니 덜컥 겁이 났다.
그가 만약 테러조직과 거래를 하고 있고 바벨의 후예의 돈을 모두 가로챘다면 확실히 왓슨 박사를 죽일만한 동기가 있었다.
점점 바이트만에 대한 의심이 쌓여갔다.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은 채, 일단 그에게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환, 일단은 진정해요. 절대 흥분해서는 안 돼요. 우선은 여기 앉아서 저 둘을 지켜보죠. 일단 제가 독일지부에 지원을 부탁할게요.”
셀레나도 모자를 꺼내 푹 눌러썼다.
광장 분수 앞에서 이야기하는 두 사람은 계속해서 주위를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주위를 철저하게 살피는 모습이었다.
직감적으로 요환은 그가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요환은 바이트만과 이야기하고 있는 사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혹시나 파도바에서 자신을 쫓던 사람이 아닌가 싶은 노파심 때문이었다.
남성은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으로 키가 크고 왜소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일 조이엘로의 지하통로에서 본 인물과도 그 인상이 크게 달라서 일단 안심이 되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바이트만과 사내는 갑자기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셀레나, 어떻게 해야 하죠?”
요환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라서 어쩔 줄 몰라하는 요환이었다.
“뭘 어떻게 해요. 따라가야죠. 요환. 이번엔 우리가 미행하는 거예요. 최대한 이상하지 않게 보이게 행동해야 해요.”
셀레나는 요환이 눌러쓴 후드 모자를 벗기고 자신이 쓰고 있던 캡을 씌워 주었다.
셀레나의 머리가 워낙 작아서 그런지 모자가 잘 맞지 않았다.
요환은 셀레나가 전해준 캡의 크기를 자신의 머리에 꼭 맞게 조정한 뒤 푹 눌러썼다.
“요환, 그렇게까지 눌러쓸 필요까지는 없어요. 오히려 더 이상해 보여요. 당신 지금 엄청 수상한 거 알아요?”
셀레나의 말을 듣고 그는 모자를 다시 고쳐 썼다.
“자,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해요. 제가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돼요.”
말을 마친 셀레나는 갑작스레 요환의 손을 잡았다.
요환은 당황한 나머지 큰 소리로 말했다.
“셀레나? 갑자기 이건 무슨?”
“쉿! 요환! 목소리가 너무 커요.”
셀레나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은 채 조용하라고 요환에게 말했다.
그냥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 그녀는 요환의 손깍지에 자신의 손깍지를 포개어 연인처럼 잡았다.
갑작스러운 셀레나의 행동에 요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런 요환의 얼굴을 보자 셀레나도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지금부터는 저랑 연인이에요.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해요. 너무 빨리 걷지 말고 상대랑 눈만 마주치지 않으면 돼요. 영화에서 본 것처럼 상대방이 뒤돌아볼 때 벽으로 숨거나 하는 행동은 절대 금물이에요. 그냥 자연스럽게 시선만 회피하면 돼요. 저쪽은 전혀 저희를 의식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의 손으로 셀레나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요환의 얼굴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뭘 꾸물거려요. 벌써 저만큼이나 갔어요. 이러다가 놓치겠어요.”
아직도 벤치에 앉아 있는 요환을 보며 셀레나는 마주 잡은 손을 당겨 요환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요환의 갑작스러운 미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