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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Oct 09. 2022

나는 나(와 똑 닮은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그 어떤 책 보다 나를 가장 훌륭한 참고서로 삼을 수 있도록...

2020.07.07

  우리 딸이 태어 난 날이다. 날짜를 보면 짐작했겠지만,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다. 수술이라고는 라섹과 포경밖에 안 해본 나로서는 배를 가르는 수술이 얼마나 무섭고 힘든 일인지 상상도 못 한다. 하지만 아내는 그것을 해냈고 위대한 어머니가 되었다. 아이가 엄마 뱃속을 너무 좋아해서 스스로 나오려 하지 않았지만, 너무 오래 있으면 산모와 아이에게도 좋지 않았다. 큰 결심을 하고 그날 4.3킬로라는 무게로 우린 아이에게 세상을 보여주었다. 코로나로 인해 수술실에 직접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 앞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앉았다 섰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인큐베이터 안에서 우렁차게 울고 있는 나의 소중한 딸을 보았다.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지금까지도 아직도 그 첫 만남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간호사는 아이의 손가락 개수를 확인시켜주고, 포토타임을 갖게 해 준 뒤 바로 아이를 신생아실로 데려갔다. 너무나 짧은 시간이기도 했고, 아빠가 된 순간이 어버버 해서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랐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아기가 나오는 순간 운명처럼 아이에게 아빠로 다가가지만, 실제로 아이를 딱 마주한 순간 '내가 이 아이의 아빠인가?'라는 주저함이 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감격스럽고 벅차오르는 감정은 여전히 나를 감싸고 있었다.


  뒤이어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와 산모는 건강하고 아이를 보고 잠들었으니, 이따가 회복실에서 만나면 된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다행이었다. 산모와 아이 둘 다 모두 건강한 상태였다. 가장 걱정이 컸을 부모님들에게 아이를 낳은 사실과 둘 다 건강하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차례로 주변 사람들에게 인큐베이터 속 아이의 사진과 함께 아빠가 되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많은 축하와 격려를 받았다. 엄마는 제왕절개로 인해 회복이 자연분만 산모보다 늦었다. 나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신생아실에 있는 아이를 보러 갔지만, 아내는 보지 못했다. 대신 내가 찍은 아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을 보며 서로 누굴 더 닮았는지에 대한 행복한 논쟁을 벌였다. 일주일 정도 회복실에서 머무른 뒤 우리는 아이와 함께 집 근처 산후조리원으로 갔다. 아내의 몸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아이의 건강 상태를 챙겼다. 난 코로나로 인해 처음 간 이틀만 머무르고, 이후로는 산후조리원에 출입하지는 못했다. 다행히 어플을 통해 아이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고, 아내가 찍은 아이의 사진과 동영상을 반복해서 보았다. 그제야 나는 한 아이의 아빠가 될 마음의 준비를 마친 듯했다.


  아이가 필요한 물품을 모두 구비해 놓고, 청소도 깨끗이 해놓았다. 아이가 드디어 산후조리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날이다. 집이니까 더 편하게 머무를 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은 나만의 오해였다. 아이는 집에 온 첫날부터 밤낮없이 울기 시작했다. 어디가 아픈 건지, 불편한 건지, 배고픈 건지, 졸린 건지, 내가 낯선 건지 알지 못했다. 아기 울음을 파악하는 어플을 깔고, 아이의 울음을 녹음했다. 하지만 매번 똑같이 '아이가 배고픈 것 같아요!'라는 해석만 내놓았다. 방금 전에 수유를 했는데, 정확도가 상당히 떨어지는 듯했다. 내 귀와 아이와의 교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아이로 인해 우리 부부는 점차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아빠가 되는 게 벌써부터 이렇게 힘들다니, 마음의 준비가 다 된 듯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갑자기 온 세상 부모님들이 존경스러웠다.


  아이는 잘 먹고 잘 울고, 기특하게도 아주 건강하게 잘 커나갔다. 크면 클수록 주변에서 아이를 보고 하는 말이 있었다. "와, 딸이 아주 아빠 판박이네요!", "아이가 딱 아빠 붕어빵인데요?", "너는 유전자 검사 안 해도 되겠다!" 그렇다. 딸아이는 커가면서 나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신생아 땐 얼굴이 불어있어서 잘 몰랐는데, 부기가 어느 정도 빠지니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아이는 나를 닮아 있었다. 갑자기 예전에 이대호, 이천수 등 스포츠 선수 딸들이 아빠와 똑같이 생긴 사진들을 보며, "와 진짜 대박이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지? 유전자의 힘이 놀랍네!" 하며 감탄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막상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하고 나니, 딸아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내가 아이를 낳았지만, 마치 내가 나를 낳은 듯한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신기하면서도, 안타깝기도 하면서도, 대견스럽기도 한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돌이 지나고, 말과 행동이 차츰 늘어가더니 아이의 성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외모가 비슷한 만큼 성향도 나를 많이 닮아있었다. 이 정도면 아내가 배신감을 느낄 만했다. 본인이 배 아파서 낳았는데, 본인 닮은 구석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아내가 내 어린 시절에 대해서 많이 물어본다. 왜 그런가 했더니 내 어린 시절을 통해 아이를 미리 파악하면 좀 더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어릴 때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등 기관 생활을 좋아했다. 그곳에 가면 재밌는 것 천지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놀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얘기를 듣고, 아내는 아이를 일찍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결심했고, 본인은 복직을 준비했다. 정말이지 아내가 내 어린 시절 얘기를 철석같이 믿고, 큰 방향에서 아이의 성향과 진로를 가늠하는 모습에 황당했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이제 아이는 27개월이 지났다. '빨리빨리'라는 말을 잘하는 모습에서 나의 성급한 성격이 보였고, 반복스러운 유치한 장난에 까르르 웃는 모습에 나의 유치 찬란한 개그 코드가 보였다. 어린이집에서 밥을 두 공기 먹었다는 소식을 알려 왔을 때 나의 먹성이 보였고, 방방이를 쉼 없이 뛰면서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닐 때 나의 운동 신경이 보였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바닥에 누워 울면서 떼를 쓸 때 학창 시절 음악 선생님이 탐내던 내 목청을 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나는 나와 똑 닮은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를 나와 동일시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러면 그 아이의 인생은 아빠의 인생처럼 쉽게 한계를 맞이할 테니 말이다. 그저 내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알려주고, 옆에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지켜보게 할 뿐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냐 마느냐는 아이의 몫이고, 아이는 아이만의 독립적인 삶을 이루어내면 되는 것이다. 단지 나를 많이 닮은 아이가 나를 그 어느 책 보다 훌륭한 참고서로 삼아 스스로의 인생을 멋지게 만들어가기 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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