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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Nov 07. 2022

친구 아이가?

"서로 맞잡은 손의 온기가 오랫동안 이어지길..."

  어제 오랜만에 대학교 친구 모임이 있었다. 친구들이라고 말해봤자 나 포함 3명뿐이었다. 그 많던 대학교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며 자연스레 가지가 쳐지고, 뿌리처럼 인연이 계속 이어진 건 결국 우리 셋 뿐이었다. 그날은 가족 모임이었기에 우리 부부 그리고 딸 모두 이른 시간부터 분주하게 준비했다. 서울 한복판 명동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경기도에 사는 우리에겐 마음먹고 가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불만을 가질 순 없다. 부산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가족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유일한 부산 친구는 약속 당일 일찍 서울에 올라다고 말했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잠실 롯데타워 전망대를 갔다가, 약속 시간인 6시까지 명동의 예약해둔 한정식 식당으로 온다고 했다.


  이 부산 친구는 스무 살 신입생 OT 때 만났다. 서울 촌놈이었던 나는 부산 사투리를 맛깔나게 쓰는 이 친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 시절 대학의 신입 OT는 당연히 술과 함께였다. 술은 쉬이 어색함을 없애주고, 긴장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니 어느새 이 흥미로운 부산 사나이와 어깨동무를 하며 웃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와 나는 공통점이 많았다. 우선 우린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찌질했다. 히나 여자에 있어서 그 찌질함은 빛을 발했는데, 둘 다 남중 남고를 나와서 여자라곤 엄마 말고 없었다. 그러니 함께 미팅을 나가도 또래 여자와 무슨 얘기를 나눠야 할지, 무엇을 좋아할지 예상조차 못하고 어버버 했다. 결국 마지막은 우리만 남아 씁쓸하게 웃으며 마저 남은 술을 주고받고, 근처 찜질방에서 함께 잠들었다.


  부산 사나이는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를 했다. 우리는 신입 OT 때 친구가 된 후로 그의 자취방이 본거지가 되었다. 나는 통근을 하고 있었기에 공강 시간이나, 수업이 다 끝난 후에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함께 술을 자주 마시다 보니 항상 돈이 없었다. 정말 돈이 없는 날에는 술은 담금주, 안주는 노래방 새우깡으로 퉁치던 날도 있었다. 안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우리의 청춘을 그대로 얌전히 보내기에는 하루하루가 아쉬웠다. 교내 동아리도 함께 들었었는데, 술 먹느라 돈이 없어서 선배들에게 점심이라도 얻어먹기 위해서였다. 하 운동 동아리라 선배들의 군기가 상당했는데, 우리는 밥이랑 술을 얻어먹어야 하므로 어금니 꽉 깨물고 고된 훈련과 행사들을 거의 1년간 버텨냈다. 함께 이런 힘든 시절을 사서 고생해보니 우리 사이는 더욱 끈끈해져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보다 대학 친구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취업을 하여 우리는 각자의 사회생활로 흩어졌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힘든 회사 생활 속에서도 휴가를 함께 보내기도 했고, 각자의 결혼할 여자 친구를 미리 소개해 주기도 하며 우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그러면서 진짜 친구는 오랜 기간 보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은 내가 먼저였다. 나는 3년의 신혼 생활을 보내고 아이를 가졌고, 내 친구는 사고(?)를 쳐서 결혼식을 뱃속의 아이와 함께 했다. 신기하게도 내 딸과 그의 아들의 생일이 딱 일주일 차이가 난다.


  저녁 6시 명동의 한정식 집에서 우리 대학교 친구 세 식구가 만났다. 커플로 다 함께 본 적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아이를 갖게 되니 부부가 함께 보는 자리를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가장 먼저 도착했고, 이어서 서울에 사는 친구 커플이 도착했다. 이 친구는 우리와는 대학 신입생 때부터 결이 달랐지만,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쭉 함께였다. 기회가 되면 이 친구에 대해서도 글을 써보도록 하겠다. 어쨌든 그는 딸아이가 뱃속에서 7개월째 머물러 있다는 아주 좋은 소식을 들려주었고, 우리는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 뒤에 바로 부산 친구의 가족이 들어왔다. 나의 28개월 딸이 그들을 보고 "아빠 친구야?, 내 친구야?"라고 부산 사나이와 그의 아들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아빠 친구는 여기 삼촌이고, 네 친구는 여기 이 아이야!"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뭔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 세대를 거쳐 자식까지 서로의 친구가 된다는 것이 현실로 이뤄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라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난 두 아이가 오랜 친구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식당 마감시간인 9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가족들의 근황과 아이를 갖거나 키우며 있었던 일들, 대학교 때의 추억들, 각 부부들의 결혼 생활 등의 얘기를 나누며 즐겁게 먹고 마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완벽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한정식 집 특유의 분위기 그리고 가벼운 술 한잔과 함께 모든 것이 어우러져 오직 그 시간의 흐름 속에만 나의 온 마음과 정신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예약한 한정식 식당이지만, 두 아이 모두 얌전히 맛있게 먹는 모습까지도 완벽했다. 아이의 장난감과 옷 선물을 나눴고, 식사는 우리 가족이 냈다. 받은 선물에 비해 식사 비용이 꽤 많이 나왔음에도 아내가 먼저 우리가 사자고 나에게 귓속말해주어 너무나 고마웠다. 서울 친구 아내가 임산부이기도 했고, 부산 가족도 아이와 함께 긴 여정을 했으니 아쉽지만 1차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친구 모두에게 카톡이 왔다. "너무 많이 나온 거 아냐? 다음엔 내가 살게!", "꽤 많이 나왔을 것 같은데, 우리 반반씩 내자. 계좌 불러줘!"라는 배려의 말이 나를 더 따뜻하게 했고, 이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까지도 우리 가족과 오랜 시간 소중한 인연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했다. 그날의 식사에서 두 아이가 처음 맞잡은 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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