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결심했을 때 우리는 연애하면서 함께 사는 미래를 그렸다. 그것만으로도 설레고 행복해했었다.1년 가까이 만나오던 시점에 본격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현실로 만들고 싶어 졌을 때, 난 프러포즈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이미 난 프러포즈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내가 연애하면서 본인의 프러포즈 로망을 공개했기 때문이었다.
"난 프러포즈받고 싶은 장소가 있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가면 100년이 넘게 짓고 있는 성당이 있는데, 그 앞에서 프러포즈받으면 어떤 말이라도 넘어갈 것 같아."
나는 처음 들어본 얘기라서 도대체 뭐 하는 곳인가 궁금해졌다. 아내를 집 앞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풍 검색을 했다.
'아, 여기가 사그라다 파밀리아라는 성당이구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1882년에 착공을 시작하여 2026년에 완공이 예정되어 있는 건축물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천재 건축가인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이라고 한다. 기독교나 천주교 신자가 아님에도 아내가 왜 여기서 프러포즈를 받고 싶어 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를 담아두고 있다가 프러포즈할 적절한 시점을 찾고 있었다. 우리가 1주년이 되는 시점이 함께 이곳으로 가서 프러포즈를 하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주말에 만나 데이트를 하던 날, 나는 지나가는 말로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우리 곧 만난 지 1주년인데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300일 챙겼으니까 1주년은 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은데..."
아내는 1주년에 대해서 별 기대와 계획은 없는 듯했다. 나는 이 때다 싶어서 담아두고 있던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리 1주년 기념으로 바르셀로나 갈까?"
아내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난 내 동공이 흔들리고 있는 게 느껴져서 얼른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내는 한참을 생각하는 것 같더니,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 바르셀로나 가자!"
그때부터 우리는 바르셀로나 계획을 구체적으로 짜기 시작했다. 모든 해외여행은 계획을 짜는 기간과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이 가장 설레고 행복한 것 같다. 우리도 바르셀로나를 갈 생각에 흥분해 있었고, 게다가 서로 말은 안 했지만 프러포즈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여행을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계획을 짜보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비행기 표와 숙소를 예약했고, 혹시 몰라서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레스토랑도 한 곳 예약해 두었다. 이 모든 여행 비용은 내가 전체 부담하기로 했다. 아내가 본인 경비를 보태겠다고 했지만, 프러포즈도 겸한 여행이기에 난 한사코 거부했다. 이왕 하는 김에 내 통장을 긁어모아서 제대로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프러포즈를 위한 반지도 미리 준비해 두었는데, 바르셀로나로 떠나기 전 짐을 챙기다가 내 가방에 반지가 있는 것을 아내가 미리 알게 되었고, 나는 민망해하며 둘러댔던 해프닝이 잠깐 있었다.
드디어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바르셀로나의 분위기를 만끽하는 것도 잠시 우리는 7시간의 시차로 인하여 굉장히 피곤했었다. 바르셀로나 시간으로는 오후 4시의 여유로운 오후 시간임에도 우리의 몸은 밤 11시 숙면의 시간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 첫날 숙소 근처만 살짝 구경하고 저녁 6시도 안 되어서 숙소에서 둘 다 뻗어버렸다.
다음날엔 미리 예약해 놓은 가우디 투어가 예정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대부분 동양인이었고 한국인들도 여러 명 보였다. 이들과 함께 바르셀로나 곳곳에 지어진 가우디 건축물들을 구경했다. 나는 건축의 세계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날 본 독특한 그의 시그니쳐 양식들이 주변 건물들에 비해 돋보이는 것은 어림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아내는 연신 감탄을 하였고 날씨까지도 좋았기에 투어 하는 내내 행복해했다. 마지막으로 아내가 말하였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도착했다. 우리는 다음날 이 성당을 개인적으로 또 갈 것이기 때문에 이번엔 그냥 간단히 맛만 보는 정도로 둘러보았다. 그럼에도 이 성당이 엄청나게 웅장하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바로 내가 고대하던 프러포즈 날이었다. 이미 아내도 그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을 테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서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하려던 계획을 난 바꾸기로 했다.어차피 저녁으로 미슐랭 레스토랑을 예약을 해놨으니, 거기서 미리 준비한 편지를 읽고 반지를 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단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는 비가 억수같이 와서 내부에서만 머무르다가 성당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비가 오는 것을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저녁 여섯 시쯤 되어 미리 예약해 둔 레스토랑으로 갔다. 큰 곳은 아니었고 테이블이 네, 다섯 개 정도 있어 아담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우리는 구석에 앉아 코스 요리와 와인을 시켰고, 한동안 여행 얘기를 나누며 즐거워했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배가 어느 정도 부르고 저녁 8시가 넘어가니, 아내가 피곤한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세 시쯤이고 아직 시차 적응이 완벽히 끝난 상태가 아니라서 나도 노곤하긴 했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서 졸고 있는 아내를 깨우고 준비한 편지를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아내는 프러포즈하는 순간이라는 걸 눈치챘지만, 내용이 워낙 길어서 눈꺼풀이 계속 감기는 걸 억지로 참아내고 있었다. 나는 속사포로 편지를 읽고 이미 아내가 여행 오기 전에 본 반지를 꺼내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아내는 반지를 받자마자 말했다.
"다 끝난 거지? 이제 우리 빨리 나가자! 졸려 죽겠어..."
나는 아내가 울면서 감격스러워하는 모습은 진작에 포기한 채 엉겁결에 답했다.
"어? 어... 끝났어. 나랑 결혼하는 거 맞지?"
아내는 졸린 눈을 비비며 말했다.
"응. 맞아... 고마워!"
이렇게 비싼 돈 주고 간 프러포즈 여행은 허술하게 끝이 났지만, 그래도 아내에게 결혼 승낙은 받았으니까 나름 성공적이라고 해야 할까. 한국 오자마자 아내와 나는 반지의 디자인을 바꾸러 갔다. 아내가 반지를 받을 땐 졸려서 잘 못 봤는데,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디자인이 본인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난 그런 액세서리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러려니 했지만, 끝까지 허술한 프러포즈에도 아내가 별 말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