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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Jul 19. 2023

어쩌다 딸과의 데이트 (feat. 네 살 육아)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일"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오늘은 회사에 연차를 냈기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계획된 나만의 일을 좀 하려고 했다. 요즘 벌이기만 벌이고 뭔가 실천은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차량 정비도 해야 했고, 동사무소도 잠깐 들러야 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아침에 아내로부터 이 계획을 모두 물거품을 만들어버리는 말을 들었다.


"똥이 아빠, 똥이가 일어났는데 약간 미열이 있는 것 같아!"


나는 아이를 키우는 집 안에선 필수인 체온계를 들고 누워있는 아이의 귀에 직접 꽂았다. 37.3도였다.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항상 '뭐가 문제였을까'를 생각하며 과거를 되짚어보게 되는데, 주말 동안 아이와 여러 가지 활동들을 했던 게 떠올랐다. 장모님 생일파티, 발레 수업, 물고기 카페 등 주말 동안 돌아다닌 곳만 해도 꽤 많았다. 도대체 어디서 옮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추측과 예상을 해가며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약간은 외부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아내는 출근을 해야 했기에 출근 준비를 하며 내게 말했다.


"이따가 등원시간까지 열이 내리지 않으면, 그냥 가정보육 해야 할 것 같아. 병원 가보고 증상이 뭔지 말해줘."


나는 뭔가 계획된 일이 틀어져 심란한 마음과 갑작스레 하루종일 육아를 전담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습해 왔다. 그렇다고 딸이 심하진 않지만 열이 난다는데 억지로 어린이집을 보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약간은 의기소침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아내가 출근을 했고, 나는 아이와 아침을 먹으며 수시로 아이의 체온을 체크했다. 활동하는 것을 보면 그리 쳐져있지는 않아서 어린이집에 보내도 될 것 같기는 했는데, 요즘 어린이집에 구내염과 같은 유행병이 돌고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망설여졌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체온이 37도에서 내려가질 않았다. 아이에게 한 번 의사를 확인한 후 등원 여부를 최종 결정하기로 했다.


"똥이야, 오늘 아프니까 어린이집 가지 말고 아빠랑 병원 갔다가 집에서 놀까?"


아이는 신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응, 나 어린이집 안 갈래, 아빠랑 놀래!"


우리 딸은 어린이집 가는 걸 싫어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아빠와 노는 게 더 마음이 편한 듯해 보였다. 아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난 계획이고 뭐고 아이와 함께 하루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아이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내 인생에서 가장 우선순위는 아이가 날 필요로 할 때 아이와 함께 있어주는 일이다.



  우선 어린이집에 가정보육을 하겠다고 통보를 한 뒤, 근처 병원으로 갔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앞서 6팀이나 대기를 하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한쪽 구석에 자리한 뒤, 아이가 오랜 시간 기다리기 지루해할 것 같아 책을 읽어주기로 했다.


"똥이야, 저기 책꽂이에서 읽고 싶은 책 가져와봐! 아빠가 읽어줄게."


아이는 한달음에 달려가 작은 손으로 네 권이나 되는 책을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내심 아이에게 책을 많이 읽어주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병원이고 손님이 많아서 큰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소곤소곤 속삭이며 읽어주었다. 그럼에도 아이가 집중해서 들어주고 재밌어해 주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책을 읽다 보니 아이 차례가 와서 진료를 받았다. 요즘 목감기가 유행이라 목이 살짝 부었다고 했다.

다른 곳엔 이상이 없었고 처방해 준 약을 하루 3번 식사 후에 먹이면 된다고 했다. 구내염 증상이 아닌 것에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아이는 병원을 나오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 나 다 나은 것 같아!"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지만, 오늘 이렇게 된 바에 딸과 데이트하며 하루를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침도 부실하게 먹기도 했고, 몸도 안 좋으니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똥이야, 아빠랑 와플 먹으러 갈까?"


"응, 좋아!"


"그럼, 아빠 커피 하나 사고 나서 와플 가게로 가자!"


아무래도 하루종일 아이와 놀아주려면 카페인이 필요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한 모금 쭉 들이키니 몸에 활력이 생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힘차게 유모차를 끌고 와플가게에 갔다. 하지만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와플가게 오픈이 11시라 문이 닫혀있었던 것이다. 시계를 보니 족히 20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아이의 표정은 시무룩해져 있었다. 비가 올락 말락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아이를 회유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똥이야, 와플가게 문 닫아서 우리 저기 마트에서 똥이 먹고 싶은 거 하나 사가자! 그리고 이따가 오후에 와플 먹으러 다시 오자! 어때?"


아이는 별로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마트에서 엉뚱하게도 장난감이 들어있는 음료를 구입한 뒤에는 다시 신나 하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와 잠시 놀아준 뒤, 약을 먹여야 하기 때문에 조금 이르게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 나는 요리 똥손이지만 다행히 냉장고에 미역국과 닭죽이 있었고, 냉동 물만두도 있어 간단히 아이 식사를 차릴 수 있었다. 생각보다 아이가 아빠가 차린 밥을 잘 먹어주었고, 약도 좀 쓴 듯했지만 끝까지 다 먹어주었다. 소화도 좀 시킬 겸 아이와 블록 놀이를 좀 하다가 낮잠 분위기를 조성했다. 잠자리 이불을 깔고 아이에게 말했다.


"똥이야, 우리 약 먹었으니까 낮잠 자자! 자고 일어나면 다 나아있을 거야!"


이 말에 쉽게 바로 누워버리면 그건 아이가 아니다.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장난감 갖고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러려니 하고 먼저 누워 자는 척을 했다. 실제로 조금 졸았다. 이는 어느새 내 옆으로 와 눕더니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약기운이 돌았던 것인지 깊게 잠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아이는 잘 때와 먹을 때가 가장 사랑스럽다는 게 정말 맞는 말인 듯싶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오늘 계획하고 있던 일을 조금이라도 해보려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집중해서 작업을 했다. 그 작업물은 조만간 틀을 갖추어 공개해 보려 한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지만, 의지만 있으면 목표로 가는 새로운 계획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다행히 아이도 두 시간 정도 푹 자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긴 하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의 체온을 재니 정상 체온으로 돌아와 있었다, 목감기가 그리 심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아이는 내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 이제 목 안 아파!"


아이가 아프면 어디가 아프다고, 힘들면 뭐가 힘들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육아가 한결 수월해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아이에게 오전에 가지 못했던 와플 가게에 가자고 말했다. 아이는 신나서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가 직접 신발을 신는 기적을 보여줬다. 오후 4시 반쯤에 간 와플 가게는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키오스크로 와플 하나를 주문하여 반을 갈라 아이와 나눠 먹었다. 어린이집을 가지 못해서 활동을 많이 못했기에 집에 가는 길에 놀이터에 들렀다. 놀이기구들은 비에 젖어 있었지만, 위험하지 않은 놀이 위주로 아이와 함께 놀아주었다. 아이가 놀다 말고 내게 말했다.


"나 놀이터에서 놀다가 엄마 데리러 갈래!"


이제 아이는 대략적인 시간관념이 생긴 듯하다. 약간 어둑어둑해지니까 엄마가 회사에서 올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느낌이 든 모양이었다. 나는 놀이터에서 실컷 놀아주다가 아내가 오는 시간에 맞춰 지하철역 근처로 아이와 함께 마중 나갈 요량이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집으로 들어가 엄마가 오는 걸 기다리자고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는 집에서 엄마가 오길 기다렸고, 나 또한 고대했다.


  드디어 아내가 왔다. 아이는 "엄마!" 하며 현관으로 뛰어갔고, 나는 소파에 몸을 털썩 뉘었다. 아빠와 아이는 둘 다 엄마가 온 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반기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놀며 아이는 엄마와 시간을 보냈고, 나는 배부른 배를 두드리며 휴식을 취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어쩌다 딸과의 데이트를 했던 하루지만,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터라 몸이 상당히 고단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렇게 또 딸과 아빠만의 추억을 하나 만들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낀 하루였다. 아이는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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