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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Oct 04. 2022

주류에서 벗어난다는 것

 feat. 삼십 대 중반 아재의 강남서 술 마신 썰

  오늘은 강남 가는 날이다. 오랜만에 친구와 이른 시간부터 술을 한 잔 하기로 했다. 3시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는 경기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준비를 해야 했다. 술 마시는데 뭐 이렇게 일찍 만나느냐고? 집이 멀기도 하고 다음날 컨디션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예전 20대처럼 밤 10시부터 시작할 순 없었다. 10시라는 시간은 이제 평소에 침대에 눕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아내의 짐을 좀 덜어주려고 나는 아침부터 육아를 전담했다. 점심쯤 되니 피곤이 쌓이기 시작했다. 막상 또 강남까지 갈 생각 하니 귀찮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일단 집을 나가기만 하면 더 이상의 육아는 끝나고 자유의 시간만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상상을 하니 다시 힘이 좀 났다. 강남 가는 길에 버스에서 좀 쉬어야지. 드디어 아이를 엄마에게 맡기고, 친구를 만나러 강남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밤 12시가 되어서 집에 들어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나는 삼십 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철저하게 주류에서 벗어나 있음을 느끼고 왔다.


입을 옷과 들을 음악이 없다

  난 강남으로 출발하기 전 내가 가지고 있는 옷을 탐색했다. 육아만 하다 보니 옷이 트레이닝복밖에 없었다. 아니면 언제 샀는지도 모를 철 지나고 바래버린 후줄근한 티셔츠 몇 장. 오랜만에 강남 입성인데, 이런 옷들을 입어야 한다니 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시간이 없기에 최근에 산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그나마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었지만, 막상 밖에 나가니 짧은 상의와 넣어 입은 통 큰 바지들이 나를 압도했다. 어쩔 수 없는 아재 패션이었다. 어차피 친구랑 술 마시는 거니까 눈치 볼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애써 달랬다. 누가 보면 강남이 집 근처라서 동네에 간단히 마실 나온 것처럼 행동하면 되지 뭐. 강남 가는 길에 노래나 들어야겠다. 갤럭시 버즈를 귀에 끼웠다. 벅스 앱을 재생시키니  핑크퐁 노래가 흘러나왔다. 좀 흥얼거렸다. 아기들 노래도 신나게 잘 만든다는 생각을 했지만, 강남 가는 길이니 벅스 TOP 100을 들어야겠다. 이름도 잘 모르는 걸그룹들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후, 내 취향이 아니다. 삼십 대 중반이 넘어가면 최신 노래는 안 듣는다는데, 그게 나를 말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버즈의 모노로그나 들어야겠다. 학창 시절 노래방에서 열창하던 곡 중 하나였다. 그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속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어지러움을 느끼다

  경기도에서 몇 년간 살다 보니까 차가 이렇게나 막힐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잠실에 들어가는 길목부터 꽉 막혀 있었다. 친구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지만 한 시간 넘게 늦을 순 없었다.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잠실역까지 걸어간 뒤 지하철을 타고 강남역으로 갔다. 그 시간이 3시 45분. 12번 출구로 나오니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렇게나 많은 차와 사람이 어떻게 이 좁은 땅에서 비집고 살아가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음속의 여유도 사라졌다. 빨리 약속 장소로 가야만 했다. 지도 앱을 켜고 친구가 기다리는 포차로 갔다. 우린 시간이 없기에 바로 술로 시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역에서 5분 거리였지만, 사람들 사이사이로 피해 다니느라고 굉장히 멀게 느껴졌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육아로 쌓인 피로감과 강남의 번잡함이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20대 때는 강남에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전혀 현기증을 느끼지 않았는데, 지금은 체력의 문제인지 정신의 문제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처절한 삶의 얘기뿐

  친구와 겨우 만나서 드디어 두부김치와 참이슬 한 병을 시키고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먼저 서로의 근황과 각자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 다행이다. 주변에서 누가 아프다더라, 다쳤다더라 하는 소식이 점차 들려오니, 건강 체크가 우선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는 현실적인 가정생활의 갈등들에 대해서 서로를 위로했다. 결론은 항상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보듬으며 사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본적인 인적 사항에 대해 체크를 하면, 일 얘기를 시작한다. 회사에서 있었던 갈등들, 이직과 커리어에 대한 고민들을 얘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경제 얘기로 넘어간다. 집 값이 조정받고 있는 상황들, 주식과 코인 계좌가 박살 나고 있는 상황들, 대출 이자와 소비에 대한 문제들... 현실적인 얘기들이 오가고 나면 가슴이 답답하다. 빨리 짠 하고 알코올로 서로의 막힌 가슴을 뚫어 내어야 했다. 그러다 20대 때 강남에서 같이 놀던 추억들을 회상했다. 강남 클럽과 밤사에서 밤 새 춤추며 놀던 기억들, 여자들과 합석하여 술 게임을 했던 기억들, 여자 친구들과 함께 커플로 술 마시며, 여행과 최신 영화 그리고 사랑에 대해 얘기를 나눴던 기억들이 생각났다. 지금은 전혀 그런 활동들에 관심이 없다. 내 삶을 살아내고, 내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현실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3차까지 갔었나. 3병 정도 마신 것 같다. 아, 중간에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한 잔 마셨구나. 주말이라 지하철이 일찍 끊기니까 11시에는 나서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단 둘이 술을 마시니 할 말도 많고, 각자의 삶에서 자극도 받았다. 삶에서 배울 게 있는 오랜 친구는 항상 소중하다. 하지만 이제 친구도 얼마 남지 않았다. 20대 때는 평생 갈 의리처럼 각자의 인생에 참견해놓고, 지금은 연락조차 없다. 그저 서로 먼저 연락해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듯하다. 아무튼 나는 오랜만에 강남에서 친구와 술 마시며 처절하게 주류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게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주류든 변두리든 뭔 상관일까. 내일은 우리 아이와 키즈카페라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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