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중앙역, 다섯시간 떠돌기

약간 고단하고 많이 씁쓸한 열차 지연

by 미 지

크라쿠프 도착 시간을 숙소 체크인 시간에 맞추기 위해 정해진 체크아웃 시간까지 머무르면서 오늘은 호텔 조식을 먹었다. 부드러운 빵에 버터와 치즈와 살라미와 계란을 듬뿍 얹어서 과일과 야채와 주스와 커피까지 챙겨 차례차례 든든하게 먹고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호텔을 나서려고 할 때 또다시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번엔 나도 우산을 꺼내지 않고 걸었다.


폴란드 1개국 유레일패스를 끊을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가고 싶을 때 훌쩍 가고 가기 싫으면 그냥 머물기로 마음먹은 여행이니 움직일 때마다 편도 티켓을 끊기로 했다. 예매를 하면 조금 싸게 표를 살 수 있었지만 그것도 그냥 넘기고 역에 도착해서 제일 빨리 오는 기차표를 발매기에서 끊었다.


11시 43분 크라쿠프행 4번 플랫폼. 전광판에 안내된 대로 플랫폼에 내려갔다. 11시 20분 무렵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 안내방송에 잠시 어수선해졌다가 흩어졌다. 누군가 나에게 열차에 대해 묻는데, 영어도 약한 상태에서 폴란드어 안내방송을 알아들을 도리가 없었다. 전광판에 30분 지연 안내가 떠 있었다.

비가 오고 있고 바람이 엄청 불거라는 안내문자를 받았다.

11시부터 한 시간 반을 넘게 모든 플랫폼에 열차가 들어오지 않았다.

30분이 지나고 아까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모였지만 기차는 기약이 없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50분으로 지연 시간이 바뀌고... 그러더니 이렇다 저렇다 표시도 없이 전광판에서 내 열차 안내가 사라져 버렸다. 그자리에 다음 열차의 스케줄이 표시되면서 그 열차에도 20분 지연이 된다는 안내꼬리표가 따라붙어있었다.


사람들이 다 같이 서성거려 주니까 마음은 약간 놓였지만 모두들 기약이 없이 그냥 승강장을 오고 가며 열차를 기다렸다.


우크라이나 재단에서 모금을 하고 있다는 젊은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10 즈워티 지폐 한 장을 기부했다. 어딜 가나 친절하고 길게 이야기를 붙여 주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인 것 같다. 종교인, 외판원, 자선단체 종사자. 나는 이번에도 그런 접근을 외면하지 못했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함께 아픔을 지고 가고 있는 중일테니 외지에서 온 내가 지갑을 열어주는 일이 맞는 일 같았다. 하지만 아주 적은 금액으로 미안함만 덜었다.


내 기차는 여전히 기약이 없는 가운데 12시 40분이 지나면서부터 그 다음 기차들이 차례차례 운행을 시작할 것 처럼 전광판에 사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오늘 나는 바르샤바 중앙역을 떠도는 유령이 된 것 같았다

30분 지연, 50분 지연 전광판에 떠돌던 안내문이 홀연 사라지고 뒤에도 플랫폼 안을 조용히 서성이는 사람들 틈에 서서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는 유령.

흔적도 없이 도착 약속이 사라져 버린 열차 티켓을 보여주며 이 열차가 캔슬된 건지 한참을 함께 서성이던 옆사람에게 물어도 그저 이 자리에 그 열차가 들어올 거라는 답만 돌아왔다.


한시가 가까워지며 지연된 내 열차의 다음 시간 열차가 진입을 했다. 열차는 소식이 없었다.


나는 2층에 있는 티켓부스에 가서 이 기차가 캔슬된 거라면 다른 표로 바꿔줄 수 있느냐 물었지만 매표소 직원은 아주 불친절하게 팔짱을 끼며 내 표를 보지 않겠다고 했다.


옆에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물어보려고 했더니 긴 줄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한 사람당 어림잡아 이십 분은 넘게 일처리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다시 1층 플랫폼으로 내려가 열차 도착 안내문이 뜨는지 확인을 해 보다가 여전히 먹통이 된 전광판의 블루스크린에 실망해서 승하차담당 안내원에게 열차에 대해 물었더니 역시나 인포메이션센터에서 처리받으라는 말 밖에 없었다. 가능하면 거기서 일처리를 하고 싶지 않아서 자꾸 피해서 다른 길을 알아보던 중이었지만 어쩔수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었으니...


티켓부스는 15번까지 있었는데 그중 1번 부스만이 인포메이션 부스였다.

열두세 명 정도가 줄 서 있었고 나도 그 끝에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줄은 어지간해서 줄어들지를 않았으니 한시부터 서 있다가 드디어 세 번째 순서가 되어서 곧 해결될 순간을 기대하며 버티던 순간, 내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서서 뒤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담당자가 2분 뒤인 세시부터 일곱 시까지 휴식시간이라고 한다.


단 하나의 부스에서 엉킨 일정으로 쏟아지는 반환표를 천천히 처리하던 그도 힘들기는 했을 거다. 15번까지 티켓팅 담당자들은 상대적으로 한가하게 보였다. 꿋꿋하게 주어진 업무량만 처리하는 직원들이었다.


오늘 어두워지기 전까지 크라쿠프에 예약해 놓은 아파트로 가야 하는 나는 휘청거리다가 그냥 포기하고 돌아서 새 티켓을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티켓을 환불받기 위해 일곱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육만 원짜리 티켓 두 번을 결재하게 되어 아주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으니 두 번째는 열차가 지연되면 바로 취소할 요량으로 어플을 다운받아서 온라인티켓으로 발권을 받았다.


15시 37분 출발, 18시 15분 도착 스케줄.

아침 11시가 채 안되어서 역 안으로 들어왔으니 오늘 나는 폴란드의 그 유명한 열차 지연 상황 다섯 시간을 겪다가 두 배의 요금을 지불하고 말았다. 두 번째 열차는 제시간에 도착한다는 안내문이 떴으므로 그나마 안도가 되었다.


조금 복잡한 절차를 거치면 티켓값을 환불받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다시 이 상황을 겪는 건 하기 싫었다. 아침에 우크라 재단에 조금 기부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환불받지 못한 티켓값의 섭섭함을 맞바꾸자고 자꾸 마음을 다듬었다.

이번에는 제시간에 출발한 기차 안에서 생각이 많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아! 이런 불쾌감을 감수하는 과정이 그리워서 남들이 잘 가지 않는 여행지를 선택했지, 내가...


모든 플랫폼이 멈추어버린 열차역에서 오르락내리락 빈 플랫폼과 티켓부스를 떠돌던 내가 낯설게 여겨졌고,나를 뺀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익숙한 풍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거의 생기지 않고 있는 일.

열차 지연과 환불 과정의 불평과 불만이 몇 년 전부터는 아주 빠른 시스템으로 바뀌어 불편함을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된 곳에서 살게 된 나는 아프리카와 동남아 몇 개 나라에서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난 답답해서 이런 나라에서는 못살아...'하고 말하곤 했었다. 우리나라의 그 편리한 시스템을 다른 나라의 느림에 대해 화를 내거나 불평하는 비교포인트로 삼고 있는 나 자신을 느꼈기에 이번에도 똑같은 말이 한숨에 섞여 나오려 할 때 나는 얼른 그 말을 삼켜버렸다. 씁쓸하고 텁텁한 맛이었다.


내가 나서 자란 나라가 그런 나라였던 적이 있었으니까. 내가 그 경직된 공무원의 모습으로 지내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쉼과 안락함과 풍요로움을 누리기 위해 선택한 여행지가 아니라 겪어보고, 느껴보고, 돌아보고, 생각해 보기 위해 굳이 선택한 여행지이니까 천천히 시간을 보내기로 다시 마음을 잡았다.


지난 새벽 미국 대통령이 폴란드 열차를 타고 우크라에 갔다는 뉴스가 나왔다.

강풍이 부는 날씨 속에 그 대통령을 태우고 다시 보내야 하니 나라 전체가 경황이 없었을 수도 있었겠다.



2023년 9월의 덧붙임.


지난달까지는 많은 비때문에 열차가 멈추어 큰 불편을 격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었다.

최근엔 파업때문에 여행객들이 난감한 일을 겪고 있다는 뉴스를 연일 듣는다.


나이스하고 마술같은 대중교통, 열차 이용 시스템은 아직까지는 서울, 경기권의 날씨 좋은 날에 한정된 것이었나보다. 인정하긴 싫지만 우리나라의 훌륭한 열차 시스템은 나에게 한정된 잠깐동안의 착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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