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흔적들

by 미 지

이틀 동안 눈이 내렸다.

그단스크에서 바르샤바로 이번 여행의 마지막 기차이동을 하러 나가기 전 숙소에서 보이는 새벽풍경을 담았다.


가까운 프라하나 부다페스트를 다녀올까 하다가 조용히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프라하는 꽃피는 봄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


가고 싶던 쿠바도 좋은 때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




'흔적'을 꽤 좋아한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집 안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아이들의 신발, 책가방, 우산, 양말, 옷가지, 책, 간식봉지, 그릇들, 반쯤 열린 문, 다친 손가락에 붙였던 밴드, 휴지조각, 핸드크림.....


엄마 없는 낮시간동안 아이들이 하교 후 강아지들과 시간을 보내다 학원에 가고 난 빈 집에 늘 남아있던 그런 흔적들. 저녁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다시 돌아와서 엄마에게 재잘재잘 하루 보낸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던 그 흔적들.


어제 귄터 그라스 갤러리에 옹기종기 모여서 해설을 듣던 아이들의 가방과 옷가지들을 속에 그때가 떠올랐다.




내 열차 여행의 흔적들이 폴란드 철도청 어플 기록에 남아있다.

아마도 이틀 동안 내린 눈으로 오늘의 기차 여정도 그렇게 정확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숙소에 내 흔적을 남기고 가방을 끌며 길을 나섰다.



많은 사람들이 바르샤바로 가기 위해 플랫폼에 모였다. 어떤 기차는 90분 지연을 알렸고 어떤 기차는 30분 지연을 알리고 있었지만 내 기차는 3분 지연으로 떴다. 이 정도면 꽤 정확한 시간에 도착할지도 몰랐다. 사실 거의 정확했다. 1시 30분 도착예정이 30분 정도밖에 지연되지 않아서 2시에 도착했으니까.


6000원 정도 가격차이가 나는 1등석 웨건의 내 자리를 찾아서 문을 열었을 때 세 명이 앉아있었다. 한 사람은 여행객일 수밖에 없는 흑인여성이었다. 그녀의 레게머리는 아주 길었고 촘촘했고 여러 색깔이었으나 색의 톤이 잘 어우러져있어서 한눈에도 공들여서 디자인한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릎 넘어서까지 올라간 베이지색의 부드러운 가죽 부츠를 신은 긴 다리가 일등석 좌석 간격도 불편한 듯 복도 쪽 자리에 앉은 앞자리의 나를 피해서 내 옆의 빈자리를 향해 사선으로 뻗어있었다. 잘 관리된 초콜릿색의 피부는 내가 지금까지 본 흑인 중 제일 빛이 났다. 실례의 표현일지 몰라도,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예뻤다.


도착 예정 한 시간을 앞두고 한 사람이 더 우리 부스에 들어왔으니, 6인용 일등석 부스에 다섯 명이 타게 되었다.

열차는 눈이 많이 내리는 철도길을 별 어려움이 없이 달렸기에 예정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유럽의 기차가 왜 제멋대로라는 악평을 얻어야 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의 문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사람들이 짜 놓은 시스템 안으로 스며들어온 빗물 한 방울이 일으키는 일에 대해서 사람들은 미리 손을 쓸 수 없다. 아직까지는 이미 생긴 일을 최대한 신속하게 수습하는 것 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


차창밖으로 눈이 많이 내리다가, 눈이 없다가, 비가 내리다가, 맑기만 하다가, 또 눈이 내리는 풍경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내가 열차라도, 내가 이 열차 기관사라도 출발지에서 시작해서 도착지까지 열 시간이 넘는 시간을 처음 출발할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달리지는 못할 것 같았다. 게다가 바르샤바 중앙역에는 이런 기차들이 하루종일 여러 대가 드나들 테니 다른 기차들의 컨디션이 더 복잡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내 기차는 30분밖에 늦지 않았다.

앞자리의 아가씨는 '이 기차가 몇 시쯤 바르샤바 중앙역에 도착하는지'를 일행들에게 물으며 아주 많이 초조해하고 불편해했다.

객차 연결칸마다 짙은 담배냄새가 풍겨 나왔다.

악명 높은 유럽열차의 지연상황을 대부분의 사람들도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바르샤바는 눈이 내렸고 센 바람이 차가웠다.

네시부터 체크인하게 되어있는 숙소였지만 한시부터 열쇠 수령을 할 수 있다는 문자가 와있었기에 두시 반에 가방을 맡겨두어도 되는지 묻는 문자를 보냈다.

준비된 방이니 얼른 이용하시라는 답이 바로 왔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번역기에 돌려서 보아도 알 수 있고, 번역기를 돌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얼른 기꺼이'라는 폴란드 말 한마디가 눈 내리고 바람 부는 바르샤바의 골목에서 한없이 따뜻했고 고마웠다.


이 아파트는 나 같은 여행객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어서 그런지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때도, 아파트를 드나들며 월패드의 버튼을 조작할 때도 사람들은 '지역 초보'의 '무지함'을 미리 알고 도와주었다.

물 두병을 사며 10 즈워티 지폐를 꺼내 줄 때 내 지갑에서 쏟아진 동전들을 보고는 거기서 30 그로시를 달라고 했다. 5.30 즈워티. 계산서에 그렇게 찍혀있었다. 동전들을 손바닥에 모아 들고 골라달라고 했더니 지폐를 돌려주고 5 즈워티 동전과 30 그로시 동전을 가져갔다.


아파트를 출입하는 키패드는 알려준 키번호로 문제없이 출입할 수 있는데 문제는 나갈 때였다.

현관에는 나갈 때 누르는 버튼이 있는데 아파트 담장의 낮은 키패드에는 나갈 때 누르는 버튼이 안보였다. 낮은 담장이라서 반대편으로 손을 뻗어서 키코드를 입력해서 나가면서 이렇게 복잡하지는 않을 텐데 나갈 때 문이 열리는 버튼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궁금했었다.


저녁 무렵 다시 마트에 나가기 위해 바깥에 가는데 멀리서부터 나를 보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한 아가씨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키패드 앞에 서서 나에게 '버튼을 눌러줄 수 있느냐' 물었다. 난 여기 버튼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웃으면서 마주선 내 오른쪽 두세 걸음 뒤편에 서 있는 기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상냥하게 말했다.

'저걸 누를 수 있어'

담장의 문과 떨어져 있는 낮은 기둥에 흰색깔의 클릭버튼이 있었다. 뒤돌아가서 그 버튼을 눌렀더니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나는 바깥으로 나왔고 여전히 밝게 웃으며 그녀가 안으로 들어갔다.


여행의 흔적들은 마무리하는 한 순간에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순간순간의 마음들이 모이고 모여서 남겨지는 것이었다.


이런 여행의 흔적들이 이기적이지 않기를.

주변이 나만을 위해 세팅되어야 하고, 내 필요에 따라 양보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다 지워버리고 천천히 여행의 흔적들을 남겨가고 다른 이들의 흔적들을 보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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