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느 소녀는

날마다 내일은 오늘과 다르기를 바라면서 살았답니다.

by 미 지

모처럼의 푸른 하늘이지만 영하의 쌀쌀한 날씨인 데다가 일요일엔 쇼핑몰도 문을 닫아서 갈 곳이라곤 음식점과 카페와 박물관들이다.

하늘을 보며 걷다가 근처에 있는 박물관 한 곳을 들렀다. 봉기기념관. 또다시 전쟁을 보고 나왔다.


바르샤바의 영어표기를 WARSAW로 하는데 그 단어는 어쩐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되었다는 이 도시에서 일어났던 독립 전쟁, 민중 봉기, 노조의 투쟁 같이 많은 전쟁을 치러낸 역사와 관련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쟁을 보았다' 라니... 미안해요, 바르샤바!)


한 달을 채우는 여행이 무리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부모님이나 가족들이 부르거나 내가 외롭거나 아파서 중간에 마무리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여행도 마지막 한 주를 남겨놓고 있다.


호스트의 취향으로 꾸며진 숙소에서 다른 여행객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가재도구들을 사용하면서 나도 나만의 흔적을 함께 남긴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으로 기억한다. 이모가 여러 장의 수건에 수를 놓고 계셨다. 그 수건에는 양갈래머리를 한 여자아이의 그림들과 함께 짧은 글들이 적혀 있었고 나는 그 몇 개의 시화 중에서 세 가지 장면을 늘 기억해 왔다.


얼굴 하나야 두 손으로 포옥 가릴 수 있지만 보고 싶은 마음은 호수만 하니 두 눈을 꼬옥 감을 수밖에. (정지용)


내 귀는 소라껍데기, 바닷물결 소리가 그리워지네. (장 콕도)


예전에 어느 소녀는 날마다 날마다 내일은 오늘과 다르기를 바라면서 살았답니다. (글로리아 밴더빌트)


글을 배우기 시작할 때 보았던 글귀라서 더 기억에 남기도 했을 것이었다. 짧고 표현이 풍부한 싯귀절을 외우는 것이 내 한글 기억의 시작이라서 더없이 좋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예전에 어느 소녀는 날마다 날마다 내일은 오늘과 다르기를 바라면서 살았답니다'하는 구절이 제일 마음에 들었었다.


수건 위에 그려진 그 삽화들의 주인공은 내가 읽던 동화책에서 본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닮아있었다. 그래서 무작정 하이디 같은 소녀는 매일매일 내일은 오늘과 다를 거라고 생각하며 살다가 축복을 받았을 거라고 혼자서 결론을 내려버리기도 했었다. 아마도 그건 맞는 결론이었을 것이다. 소공녀 세라도, 소공자 세드릭도, 플란더스의 개와 네로조차도 날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냈을 것이다.


하나. 음식 고생하지 않고 웬만해서는 탈 나지 않고 잘 걸을 수 있는 데다 조금만 쉬면 금세 회복되는 건강.

둘. 아낌없이 몰두해 왔던 일이 있었고 머물러 쉬도록 허락된 시간.

셋. 어떤 사람들에겐 작은,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겐 많은 금액일 수 있는 비용.

넷. 낯선 곳이 궁금해지는 호기심.

다섯. 낯선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묻고 실수해도 그저 떨치고 일어나 길 떠날 수 있는 용기.

여섯. 센스라는 말은 너무 고급스러운 표현이다. 그냥 말 안 통하는 순간순간마다 발동되는 훌륭한 기질인 눈치.

일곱. 술 마시고 흥청거리는 분위기 안 좋아하고, 쇼핑 안 좋아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멘탈 파워.

여덟. 그저 감사하게도 다녀올 것을 응원해 주었고, 건강히 다녀오는 날을 기다려주고 있는 가족들의 관용.


엄마가 나에게 물려준 토대 위에서 그렇게 허락받은 최대치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나는 줄곧 엄마가 나에게 물려준 '엄마로서의 빈자리'에 대해 생각한다. 엄마도 알지 못했고 시어머니도 알지 못했고 나도 알지 못하고 아마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알지 못하고 있을 '엄마로서의 꽉 채워진 자리'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면 생각이 가서 닿는 자리는 언제나 아들과 딸들에 대한 미안함이 된다.


알지 못하는 길에서 만나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최대한의 답을 찾아가며 살아가야 하는 시간들의 구석구석엔 온통 전쟁뿐인데 그 전쟁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았는가?' 되물어야 하는 역사적인 사실만 폐허 속에 싸늘하게 남아버린다. 그 시간들을 박물관의 유물로 박제시키면서 세상의 모든 엄마들과 그들의 자녀는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이겠지. 우리의 전쟁은 슬펐고 괴로웠고 미숙했고 결과는 늘 초라했을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항상 위대했다고. 전쟁은 반복될 수밖에 없으니 이 전쟁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날마다 다른 내일을 만들어가라고.


여행을 하면서도 여행을 마무리하면서도 여행을 마치고 나서도 여전히 내일은 오늘과 다르기를 바라면서 지내겠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실천하는 것은 분별이 없는 것이라는 조언도 이젠 받아들여야겠지. 그리고 답은 없겠지만 여전히 최선의 답을 구하면서 '어제와 다른 내일'을 온전히 나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는 일을 시작해야겠지.

keyword
이전 23화여행의 흔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