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 지 Mar 26. 2022

꼰대 지수를 확인한 책읽기, 빨강머리 앤

어떤 책은 읽기에 꼭 적절한 나이가 있다.


지난달에 갑자기 '빨강머리 앤'을 다시 읽고 싶어 졌다.

사춘기 시절의 설렘을 생각하며 책장을 펼쳤는데, 맙소사!

매슈와 앤이 만나는 첫 장면에서부터 앤의 목소리가 종알종알 귀가 아프게 들리는 것 같았다.

도대체가 시끄러워서 책장이 넘어가질 않는 것이었다. 힘들게 몇 장을 넘기다가 또 내가 멈추는 지점이...

'마릴라'와 '매슈' 남매는 어쩌다 이 나이가 되도록 각자의 가정도 꾸리지 않고 입양 아이를 찾는 사연을 가지게 된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수다스럽지만 귀엽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당차고 야무진 빨강머리 앤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여전히 잘 묘사된 상황과 생기 넘치는 인물들 덕에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난 반도 채 읽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다. 그러면서 예전에 읽다가 포기한 책 한 권이 생각났는데 그것은 존 케네디 툴의 '바보들의 결탁'이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 나의 내면에서는 '인생,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 아냐? 식단 관리를 좀 해 봐! 조금만 성실해질 수는 없을까? 예의라는 말 들어보기는 했어? 손톱만큼이라도 착한 생각을 해 보면 어때?' 하는 잔소리가 나오는데 개선의 여지는 새끼손톱만큼도 없을 것이 뻔한 주인공 이그네이셔스의 모습을 끝까지 볼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면 안돼!', '이렇게 해야지!' 하는 꼰대 지수 만랩을 채우게 만드는 책이었다.)


10대 시절, 나는 삶의 무게에 대한 진중한 고민으로 '자기 앞의 생'과 '생의 한가운데'를 밑줄 그어가며 읽었었다.

어떤 책은 너무 어린 나이에 읽어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지내다가 뒤늦게 알게 되는 것들로 가슴을 치게 되는 일도 있다.

내게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 그랬다. 그 이름이 작가 로맹 가리의 부캐였다는 것과, 그 작가가 자기 어머니의 이야기인 듯 아닌 듯 풀어나간 이야기 '새벽의 약속'에서도 느껴지던 엉킨 먹빛의 실타래를 풀어버리고 싶어지는 애잔한 슬픔의 빛깔이 들어있는 책이었다는 것을 10대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 책은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였다는 것을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는 서툴게 어른으로 향해 가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되뇌게 만드는 구절을 남겨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운명이 없어. 그런데 그것은 그들 탓이야. 그들은 운명을 원하지 않거든. 단 한 번의 큰 충격보다는 몇백 번의 작은 충격을 받으려고 해. 그러나 커다란 충격이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거야. 작은 충격은 우리를 점차 진창 속으로 몰아넣지만, 그건 아프지 않지. 일탈이란 편한 점도 있으니까. 내 생각으로는 그건 마치 파산 직전에 있는 상인이 파산을 숨기고 여기저기서 돈을 융통한 후 일생 동안 그 이자를 갚아가며 늘 불안하게 사는 것과도 같지. 나는 언제나 파산을 선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쪽을 택하고 싶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나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

가끔은 예기치 않게 나의 꼰대 지수를 깨닫게 할 힘도 있는 일이면서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퇴화도 발달의 단계라고 하지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