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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Jan 17. 2023

아버지의 가방

불화하는 노년의 부부가 별거를 시작했던 10여 년 전 어느 저녁이었다.

나는 아직 차가움이 채 가시지 않은 채 혈기 넘치시던 아버지를 찾아뵙고 여러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부탁을 드렸었다.


아버지께서 혼자 지내시는 것, 우리 삼 남매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것 하나가 있다면 함께 교회에 다녀 주시는 것이라고. 교회에 함께 가 주신다고 해서 엄마와 화해하는 길을 찾아보겠다는 약속은 드리지 못하지만 지금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저 일주일에 한 번씩 제가 아버지를 교회에 모시고 다니는 일부터 해 보려고 한다 말씀을 드리면서도 자신은 없었다.


살아생전에 가장 하지 않을 일 하나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 상종하는 일을 꼽으시던 분이셨기에 함께 교회에 다녀달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는

여러 날을 고민했다는 말씀도 함께  드렸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이야기를 들으시다가 작은 목소리로 답을 주셨다.

'네가 그렇게 해야 편하다면, 가기는 싫지만 한 번 가 보겠다'라고.


상대에 대한 시선은 차갑고 나에 대한 연민은 뜨거운데 너무나 건강한 체력이 단지 나 자신을 위한 방향만을 보며 달리다보면 무언가 잘못되었다 느끼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아마도 아버지도 그 즈음 그런 시간을 보내고 계셨었던 것 같았다.


그 후로 오랜동안 나는 매주 일요일이면 아버지를 모시고 교회에 나갔다. 불편하셔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예배에 참석하시는 아버지는 동년배 어르신들과  나눔을 하는 구역예배도 빼놓지 않으셨었다. 아버지는 기도 차례가 되면 기도문을 써 달라고 하셨다. 그러면 나는 아내와 가족과 구역 식구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하는 내용 중간중간에 혈기넘치던 시절의 미숙함에 대해 한두마디 고백을 적어드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느 날 아버지는 선언하시듯 말씀하셨다.


"내가 그렇게 가지 않겠다고 하다가 다녔던 교회 말이다. 4년을 넘게 다녔는데 대학생이라면 벌써 졸업했을 세월 아니겠냐. 이제 그만 다녀도 되지?"


'목장'이라고 부르는 구역예배의 구성원이 모두들 70대 이상의 어르신들이다 보니 신앙심 깊은 분들끼리 한 자리에 모여서 밥과 차를 나누며 믿음 안에서 도란도란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일에 무척 애착을 가지시기도 하셨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마음 깊이 의지하던 분들이 홀연히 하나님 곁으로 가버리셨다는 소식을 듣는 일도 몇 차례 고 난 다음이라 아버지의 그 말씀에 딱히 다른 의견을 내지는 못했었다.


불화했던 엄마와 화해하는 노년의 마무리를 꿈꾸었지만 이제  한줄기  소망을 이루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엄마의 기억은 영영 돌아와  것 같지 않게 되었으니 아버지는 엄마의 외로운 병원생활 을 떠올리며 당신도 하나씩 하나씩 당신의 물건들을 줄여가고 계시는 중이라 하시면서 이젠 다른 이에게 나누어주라고 십여 년 전 내가 아버지께 드렸던 가방과 성경책을 돌려주셨다.


이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교회를 가기 위해 내 차를 기다리시던 아버지였다. 초등학교 한두해 다닌 기억이 전부였던 아버지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된 기분으로 교회에 나가 성경책을 펼쳐 예배드리고 찬송도 하고 구역 식구들과 말씀도 나누는 일을 하셨다고 하시며 웃어주셨다.


제대로 보고 배우고 사랑받았었다면 그리 고단한 삶을 살지는 않으셨을 터였지만 그 또한 당신의 삶이었다고.

너희들 밥 굶게 하는 건 하지 않겠다는 다짐 하나는 지켰다고.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고생만 하다 저렇게 된 엄마, 늦었지만 마음 편한 곳에서 훠이훠이 살게 하라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교회 출석기간 동안 아버지 또한 세상에 대해 넉넉한 웃음을 보내는 것 정도는 하실 수 있게도 되었지만 불화하는 부부로 노년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일밖에는 남은 것이 더는 없는 것 같다.


서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상대의 평안을 빌어주는 모습을 보는 것이 축복이라면 축복일까?


나이 많아 늙었어도 나누어 줄 것 있는 인생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때가 당신 인생에서는 없었다 말씀하시며 가방을 돌려주시는 아버지의 미소를 가슴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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