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 지 Jan 06. 2023

안부를 묻지 않아도 괜찮은 기억

"선생님! 저, 해저문이요!"


깍두기공책에 빽빽하게 학교 이름과 교장선생님 이름을 쓰면서 글자공부를 하던 국어시간. 하얀 빛에 포동포동한 볼살이 귀여웠던 아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해 못 할 말을 했다. 어제저녁에 식구들과 노래방엘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하라고 시키지도 않았고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양 손을  턱 밑에  모아 잡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첫 소절부터 아하! 소리가 나오게 만든 그 노래는 바로 '소양강 처녀'였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ㄷㄹ새야"


새 이름 같은 것 제대로 읽고 쓸 줄 아는 아이였으면 내 교실에 공부하러 오지도 않았겠지만 금이나 그때나 두견새를 바르게 발음할 수 있는 아홉 살 아이가 몇이나 될까?


 아이는 긴 머리에서 자꾸 흘러내리는 머리띠를 쓸어 올리며 앙증맞은 손사래와 귀엽기 짝이 없는 율동을 섞어가며 지그시 눈을 감고 노래를 이어갔다.


 '아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시키지 않은 노래를 멈추게 하려고 눈을 부릅뜨며 쳐다보다가 어느새 힘이 빠진 내 눈과 입술옆으로 길어졌고 마음과는 다르게 저절로 박수가 나오는  공연을 끝내고 난 뒤 아이는 다시 열심히 글자를 썼다.


삐그덕거리는 마루에 왁스를 발라가며 청소를 하던 교실에 나무장작을 때던 난로가 떼어지고 석유난로가 들어온 겨울을 번 더 지나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바뀌게 되는 학교 명패 현판식을 아이는 보지 못했다.


아이는 국민학교 2학년 여름방학 물놀이를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국어 교과서의 문장을 도트프린터로 인쇄해서 쓰기 학습지로 엮어 준 여름방학 숙제를 너무나 재미있어했다고 아이 엄마가 울면서 말했다.


소양강댐에 가면 아이가 생각난다.

소양강 처녀 노래를 들을 때도 그 아이가 생각난다.

긴 생머리 흘러내리는 머리띠를 한 아이를 보아도,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들을 보아도.


85년생. 열 살 나이도 채우지 않고 휘리릭 세상을 떠난 내 가슴속 동화의 주인공.


공장의 검은 연기가 하늘의 구석구석에서 보이 마을의 학교.

넉넉치 않은 가정살림에 보습학원 한 번 는 일 같 건 엄두도 못 내서 한글 떼기를 놓쳤던, 그래서 내 교실로 공부를 하러 왔던 아이를 홀연히 보내버린 일은 그 후 몇차례나  나 자신을 흔드는 일들을 겪어가면서  추억이 아닌 슬픈 동화로  남았다. 


가장 슬픈 소식과 가장 기쁜 소식은 다 그 학교에서였다.


 다음 해에 여자아이의 남동생이 다시 우리 반에 왔다. 한글을 익히지 못했다는, 누나와 같은 이유로.

남자아이도 귀여웠다. 그리고 개구쟁이였다. 난로에 넣을 석유를 마룻바닥에 쏟아버린 바람에  몇 날을 바닥청소를 하면서 한없이 약이 오른 나는 아이를 노려보며 야단을 쳤다.

아이는 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가 들면서 천연덕스레 말했다.


"와! 선생님 눈 되게 크다. 내가 그 속에 다 들어가 있네!"


펄펄 뛰며 화를 내다가 천진한 아이의 말에 갑자기 무장해제당해버려서 까르르 웃음이 나와버린 나는 그 뒤로 좀처럼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에게는 화를 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남매를 모두 다 특수교사에게 보낸 그 엄마와 아빠의 마음의 무게가 두고두고 내 마음속에 커다랗게 자리 잡았었다.


남자아이는 중학교에 가서 한글을 척척 읽게 되었고 다니는 교회에서 칭찬받는 인재가 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으므로 여자 아이를 떠올리는 일도 천천히 가벼워져갔다.


흘러가는 세월이 가끔 기억들을 헤집어가며 어쩌면 아픈 어떤 기억 하나쯤은 추억으로 바꾸어주기도 한다.


지극히 견뎌온 삭풍이 물러간 뒤에 추억은 더 이상 동화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안부를 묻지 않아도 괜찮은 어른들의 이야기가 되어준다.






작가의 이전글 또 한 계절을 보내며 쓰는 에필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