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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Feb 01. 2020

통근버스 진담집

하루 네 시간을 길 위에 있다보면 온갖 생각이 든다.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밖에 없어서다. 어떨 땐 도축장 실려가는 돼지가 된 것 같다가, 또 어떨 땐 마른 산 너머로 아스라이 떠오르는 아침햇살에 아제르바이잔 같은 미지의 나라를 여행하듯 설렌다. 아파트와 공장이 없는 우리 땅 풍경은 실제로 꽤 이쁘다.


아제르바이잔은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사라진다. 눈 앞에 건방 떨며 서 있는 사옥 보고 기분 잡쳐서다. 신입사원 땐 그렇게 어여뻐 보이던 건물이 이젠 몸 안의 수분을 모두 증발시키는 사막처럼 느껴진다. 그 앞에서 난 <기생충>의 기정처럼 독도는 우리 땅 리듬에 맞춰 마법의 주문을 외는 것이다. 카드값, 관리비, 신대마통, 원리금♬


차가 막히는 날엔 방광이 터질 것 같은 고통에 10년간 찾지 않았던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게 된다. 그나마 인고의 시간은 화장실에서 달게 보상받는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은 따로 있다. 바로 옆사람의 몸이 닿는 불쾌감이다.


맹세컨대 난 쩍벌남은 아니다. 옆좌석과 분리된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몸을 움츠리는 상도덕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리털에 거위털에 털이란 털은 모조리 쑤셔 넣은 것 같은 패딩을 입은 사람 옆에 앉으면, 게다가 그 사람이 스테이크 같은 팔뚝을 가진 형님이라면 퇴근길은 악몽이 된다. 엄습하는 스킨십에 선잠도 들지 못한다.


잠을 못 잘 바엔 시간이라도 활용하자는 다짐을 했었다. 아... 이북리더기, 시사라디오, 영어리스닝, 명상어플 등 내 인생에 잠시 등장했던 작심3일의 전사들이 눈 앞을 스쳐간다. 내가 의지박약인 건 인정하지만 통근버스에서 장시간 집중력을 유지하 건 쉽지 않다. 고속도로의 소음과 없는 진동이 청각과 시각을 고정적으로 감가시키기 때문이다.


게다가 놀다 온 것도 아니고, 이 사람들 전부 보고서에 민원인에 팀장에 부장에 국장에하루종일 시달리다 버스에 탔을 텐데, 꾸준히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그런 인간 같지 않 인간이랑 상종을 안 하고 싶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멍 때리고 있으면 사람이 우울해진다. 점점 회사와 회사 밖의 시간을 분리하기 어려워진다. 예전엔 통근버스가 슈퍼맨에 나오는 전화부스처럼 역할 전환을 돕는 공간이었는데, 이제 지 역할을 못한다. 회사의 일과 회사 밖의 일이 자꾸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책임은 커지는데 깜냥은 더디게 자라니까. 몸이 무거워지지 않으려면 때를 자주 밀어주는 수밖엔 없다.


이 매거진은 일상에서 연소되지 못해 쌓인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이자, 통근버스에 앉아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려는 마지막 시도다. 가능하면 나와 출퇴근길을 함께 하는 전우들이, 그러니까 일하고 연애하고 가정을 꾸리고 깨지고 깨고 지지고 지져지면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혹은 행복하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는 보통의 직장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글이 됐음 좋겠다.


내가 수학여행  한 번도 앉아보지 못한 자리, 바로 일진들을 위한 맨 뒷좌석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뭐라고 얼거리면서 스마트폰을 눌러대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면 모른 척해주시라.  써서 돈 벌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나중에 로또 1등 되면 꼭 우등버스 바꿔드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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