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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Jul 08. 2020

책을 읽다 한강에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새내기 땐 인천에서 서울로 일 년간 통학을 했다. 군대에 다녀오니 도저히 통학하기 어려운 거리로 집이 옮겨져 있었다. 자취를 시작했다. 해도 들지 않는 한 뼘짜리 반지하방이었지만, 처음 갖는 온전한 내 세상이 좋았다. 가끔 튀어나오는 바퀴벌레조차 낭만인 시절이었다. 아쉬운 건 하나였다. 이젠 매일 양화대교를 건널 수 없다는 것.

그땐 열차 밖으로 한강을 보는 게 낙이었다. 수천만 윤슬로 뒤덮인 이른 아침의 강은 어떤 힘내라는 말보다 위안이 됐고, 강물에 비친 여의도 야경을 보며 끝 모를 설렘을 느꼈다. 매일 한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며 이런 생각을 했다. 여길 천 번쯤 오고 간 뒤에 난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게 벌써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니 천 번의 실적은 제법 채우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운 좋게 지금까지 살아 있고, 이젠 매일 출퇴근길에 동호대교를 지나게 됐다.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강을 바라보며 그때와 같은 생각을 한다.

다음 십 년 뒤에 난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오랜만에 서점에 갔다. 살면서 가장 큰 행사였던 결혼식을 잘 마친 내게 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손에 들고 나온 책은 재테크 서적이었다. 스타벅스 커피맛은 달달한데 책장을 넘길수록 기분이 안 좋아졌다. 벼르고 벼르다 올해 처음 읽기로 한 책이 돈에 대한 개똥 같은 철학만 남발하는 자기계발서라니.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을 골랐다는 걸 깨달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주변에는 내 삶을 대신 재단해주는 사람들만 늘어간다. 내 일생의 목표는 어제보다 1cm 더 깊게 생각하고, 한 줌 더 강한 멘탈을 갖는 건데 자꾸 그걸로는 안 된다고, 강남에 집을 사겠다는 야망을 가지라고, 쥐꼬리만 한 월급을 부끄러워하며 투잡을 가지라고 채찍질을 해댄다. 예전 같으면 "그쪽 앞가림이나 잘하세요."라며 무시했을 이야기들을 이젠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미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경제력에 대한 압박은 날이 갈수록 날 짓누른다. 5년간 성실하게 일했고, 충실히 모았다. 나를 위한 소비는 일 년에 한 번인 여행과 한 달에 책 한 권 사는 정도였다. 부모님께 과분한 지원도 받았다. 그런데도 돈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이유는 대출상환의 압박 때문만은 아니다. 남들과의 비교 때문이다. 이놈의 상대적 박탈감은 자꾸 내게 결핍감을 심어준다. 나는 저들이 이야기하는 삶을 원하지 않는데도.

회사에선 소신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가 가진 당당함의 근거를 가늠하기 바빴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게 대전제였다. 저 과장은 부모가 대기업 사장이고 강남에 집이 있어서 바른말을 하고 사는 거라고,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납작 엎드려서 살아야 한다고 신입사원들을 붙들고 예정에 없던 멘토링을 해댄다. 그렇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당당하면 주변에서 당황하는 세상이 됐다. 소신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예전엔 무언가가 되고 싶어서 십 년 뒤를 꿈꿨는데, 이젠 십 년 뒤 내가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을까 두렵다. 범람하는 오지랖 속에서 가치관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남의 인생을 재단질 하기 바쁜 천박한 이들의 시선에 잠식돼, 소중한 시간을 괴로움으로 낭비할까 걱정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역시 저들을 닮아 있을까 무섭다.

동호대교를 지나며 다짐한다. 내 남은 시간은 오직 우리의 삶에 진정 관심 있는 이들의 이야기만 듣기로. 쓰게 삼키거나 달게 뱉는 건 온전히 우리의 몫이니, 아무거나 주워 먹진 말자고 말이다.




내 인생엔 앞으로도 외제차나 값비싼 시계는 없을 거다. 외제차 살 돈이 모이면 투자나 저축을 하고, 시계 살 돈이 생기면 우리 가족의 자기계발이나 여가를 위해 쓰는 게 더 행복하니까. 투잡거리는 계속 찾겠지만 그건 월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다.

그때 산 재테크 책을 한강에 던져버리진 않을 거다. 끝까지 정독하고, 건져낼 부분만 정리해 아내에게 공유하고, 알라딘에 팔아버려야지. 깨끗하게 읽고 S급으로 상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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