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라니 Jun 20. 2021

휴가를 내고 동네 도서관에 갔다

아내가 주민센터에 도서관이 생겼다는 꿀 정보를 입수했다.


필기시험 전날, 공부를 위해 휴가를 내고 도서관을 찾았다. 작고 아담했다. 대학도서관으로 치면 "한국소설 ㄱ~ㅁ" 분량의 도서가 옹기종기 혀 있었다. 좌석 많지 않아 서둘러 자리를 잡았는데 코로나 영향인지 자리가 다 차는 일은 없었다.


방문자는 한 시간에 한두 명 정도였다. 평일엔 어떤 사람들이 동네 도서관을 찾을까 궁금했다. 오전엔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오후엔 엄마 손을 잡고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신기한 건 아이들이었다. 엄마를 따라 마지못해 온 게 아니라, 오히려 엄마 손을 끌고 들어오며 이런저런 책을 찾아달라 조르고 있었다.


한 번에 다섯 권만 대출이 가능하다는 사서의 말에 엄마가 "준호가 3권, 엄마가 2권 빌릴까?" 하면, 아이는 고민하다 "엄마 보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한 권 양보할게." 라고 한다. 책을 고르는 아이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원하는 책을 천천히 음미해 그 정서내 것으로 만드는 즐거움을 벌써 아는 것 같았다.


도서관 저 편에는 토익책을 보고 있는 대학생이 있었다. ㅇㅇuniv. 라고 적혀 있는 야구잠바를 보며 신입생 때 받은 우리 학교 바람막이가 떠올랐다. 투박하지만 바람만큼은 진짜 잘 막아주던 그 옷은 아빠가 공원에 나갈 때 입는 유니폼이 됐다. 


옷의 진짜 주인은 대학만 가면 끝이라는 거짓말에 한 번 속고, 취업만 하면 진짜 끝이라는 거짓말에 두 번 속아 다신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사람이 됐다. 두 번째 이직을 위해 도서관을 찾은 지금은 새시작이란 없으며 할 수 있는 건 현재의 개선만이라는 걸 안다. 정해진 노선을 따르기만 했던 어린 시절은 일종의 특권이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저 아이는 앞으로 취향과 상관없이 많은 책을 읽어야 할 거다. 반짝이는 눈으로 좋아하는 책을 고르는 대신,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고 우는 날이 많아질 거다.

저 대학생은 언젠가 취업에 성공하겠지만, 합격의 기쁨은 아주 잠시라는 걸 알게 될 거다. 밥벌이가 해결된 이후에는 또 다른 결핍감이 눈앞을 채운다는 것도.


그러나 지금 도서관에서 각자의 독서를 하고 있는 우린 지나간 것들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쓸모와 상관없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한 시간은 내 안에 건강하게 쌓여 힘들 때 꺼내 쓰는 에너지가 되고, 어려운 시기를 이겨낸 자부심은 어떤 고난도 똑바로 마주 볼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그러니 이 시간은 우리를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과정일 거다.



도서관은 5시에 문을 닫았다. 도서관을 나서는데 저 편에 꼽혀 있는 해리포터가 눈에 띄었다. 언젠가 너를 읽으러 돌아오리라 다짐하며 건너편 스터디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집 거실에는 TV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