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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Jun 13. 2021

우리 집 거실에는 TV가 없다

첫 번째 결혼기념일

우리 부부가 지난 일 년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는 소파도 침대도 아닌 책상이다. 결혼기념일인 오늘도 우린 호캉스를 다녀오자마자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아내는 CFA 2차 준비를 위해, 난 부족한 재테크 지식을 쌓기 위해서다.


결혼 전, 아내와 내가 공통적으로 가졌던 로망은 TV 대신 책장과 책상이 있는 거실을 갖는 것이었다. 우린 여가 시간에 TV를 보는 대신 함께 자기 계발에 힘쓰는 신혼을 꿈꿨다. 맛있는 걸 먹으러 놀러 다니는 생활을 마다하고 싶진 않았지만, 젊을 때 더 크고 넓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먼저였다. 


그리고 그 크기로만 따지자면 아내는 나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솔직히 난 TV 없는 거실에서 구체적으로 무얼 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우리 집 거실에는 TV가 없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우리 부부는 그런 부부라는 사실 자체에 취해 있던 거다.


아내는 달랐다. 숨 가쁘게 결혼 준비를 하는 와중에 CFA 1차를 패스한 아내는 식을 올리자마자 바로 다른 재무 자격증을 따고, CFA 2차 준비에 돌입했다. 내 이직 준비로 한동안 자기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지만, 일요일 밤인 지금까지 아내는 호주와 일본, 미국에 있는 수험생들과 줌으로 스터디를 하고 있다. 


난 살면서 아내만큼 성실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공부뿐만이 아니다. 아내는 취미도 자기 관리도 재테크도 뭐든 대충 하는 법이 없었다. 가끔 한계 이상으로 열정을 쏟아 왜 너는 속 편하게 가만히 있냐며 뿅망치로 나를 톡톡 치기도 하지만, 그런 아내를 보면 나도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절로 생긴다. 동시에, 오래된 앨범에서 봤던 아내의 어릴 적 사진들이 떠오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어린 아내는 작고 귀여웠지만, 그 나이 때 아이들이 보통 갖고 있는 천진한 얼굴은 찾을 수 없었다. 웃는 표정조차 정제돼 있었고, 눈은 맑지만 어른의 것처럼 차분했다. 한창 떼쓰고 고집부려야 할 어린 시절에도 아내는 어떤 책임감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이 떠오를 때면, 내가 남편으로 마땅히 해야 할 책무를 소홀히 해 아내가 스스로를 더 다그치고 있는 건 아닌지 미안함이 커진다.


난 아내가 그저 성실하게 사는 게 좋아서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길 바란다. 


이를 위해 일 년 전 오늘 아내에게 약속한 것들을 실천하려 한다. 네 고운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항상 한걸음 먼저 나아가고, 네가 할 모든 걱정들을 먼저 하려 한다. 

내 얘길 들어달라고 재촉하느라 너의 울음을 외면해온 일 년이었으니, 이제 내 이기심은 멀찍이 치워 두고 네가 편히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고 싶다.


다음 결혼기념일엔 행복한 기억이 훨씬 많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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