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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r 18. 2022

가끔은 맥주가 없어도 한강에 취한다

다시 한강을 걷기 좋은 날씨가 찾아왔다. 아직 강바람이 차지만 주머니에 넣은 캔커피의 온기만으로 쉬이 견뎌지는 수준이다. 퇴근 뒤 지하철 대신 한강변에 들어서면 세상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사무실에서 절박한 이들의 이야기를 하루 종일 듣다가 귀를 막고 사라지고 싶어지는, 바로 근처에 도망칠 곳이 있으니 다행이다.


하염없이 집 으로 걷다 잠시 강 건너를 바라보면,

홍시에 밀가루를 뿌린 것 같은 하늘 아래 뾰족하게 솟은 롯데월드타워가 보인다. 그곳에 나의 첫 직장이 있다. 타워가 완공되기 전에 이직을 했음에도 향수를 느끼는 건 동기들 때문이다. 저 에는 경민 형이, 저기선 이소담과 왕자가 일하고 있겠구나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좋아한 친구는 아마도 저들이 마지막일 거다. 삼십 대 중반인 지금은 어느 정도 마음을 줄지 미리 한계를 정하고 사람을 대하게 됐다. 앞으로 너와 나 사이에 생길 이해관계가 어림 잡혀 계산적으로 힘조절을 하는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남에게 줄 마음이 작아졌. 지금은 남을 좋아하기는커녕 나를 싫어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유쾌한 사람만큼 불유쾌한 관계도 많았기에 점점 방어적이 되어 간다. 맨 마음을 내보였다 세게 데인 경험이 쌓여 "적당한  최고야"라는 이름의 훌라후프를 붕붕 돌리며 경계하고 사는 느낌이랄까. 신입사원만 7년째라 생존을 위한 을로서의 저자세가 체화된 건가 싶어 씁쓸하기도 하다.


그래도 다시 롯데월드타워를 올려다보면 찝찝한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지니 신기할 뿐이다. 문득 떠올라 몇 개월 만에 카톡을 보내도 과한 추임새 없이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걸로 족하다. 서로 세월에 바빠 직접 마주해 얘기 나누는 시간은 줄어가겠지만, 살면서 내가 좋아했고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저쯤에서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한강에 취했든 옛기억에 취했든, 맥주 없이도 제법 알딸딸해진 걸 보니 가성비 좋은 음주였. 

조금만 더 있으면 추워서 입 돌아갈 것 같으니까 빨리 집에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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