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마라

by 이영범

종합상사인 L사의 해외영업팀 근무시절에 배운 여러 가지 ‘영업사원의 자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마라’ 이다. 하루에 수십 가지의 일들을 접하는 영업담당자가 매일 일어나는 일을 모두 기억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항상 기록하고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것이다. 영업사원의 메모하는 습관은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고 그에 관한 책도 많이 있지만 아직도 그것이 계속 전문가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는 것은 실제로 잘 안 지켜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도 그것을 선배로부터 말로만 배웠지 실제 영업에서 적용하지는 않았다. 물론 기록을 전혀 안 하는 건 아니었지만 모든 것을 세밀하고 상세하게 메모하지는 않았다. 즉, 필요하고 중요한 사항은 기록을 하여 남기기는 했지만 사소한 사항까지 메모를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마라’라는 말을 피부로 느끼게 된 일이 하나 발생했다.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하여 친구들과 소주를 한 잔 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핸드폰이 갓 일반화되었던 시기라서 친구들과 만나면 핸드폰 있는 친구끼리는 핸드폰 번호를 서로 교환했었는데, 한 친구의 전화번호가 5xx-xxxx 이었다. 메모를 하려고 하다가 “야, 설마 그 번호를 잊어버리겠냐?” 하면서 메모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어찌 5xx-xxxx, 이 전화번호를 잊어버리겠는가? 그런데 그리고 한 달쯤 지나서 그 친구한테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그 전화번호가 기억이 안 나는 것이 아닌가? 분명 그 친구 전화번호 7개 중 하나는 5이고 나머지는 전부 x인데, 그 하나 뿐인 5의 위치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5xx-xxxx 이었던가? xxx-5xxx 이었던가? 갑자기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졌다. ‘내가 이렇게 머리가 나쁜가?’ 그때 느꼈다. ‘아, 자신의 기억력을 믿으면 안 되는구나.’


점심을 먹으러 어느 식당에 갔다. 그리 단골은 아니었지만 조용하고 가격도 저렴하기에 가끔 혼자 점심을 먹을 때 가는 식당이었다. 그날은 점심을 먹기에는 좀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식당은 이미 한 차례 점심 손님들을 치른 상황이라 여기 저기 테이블위에는 이전 손님들이 식사를 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청소가 된 테이블에 앉아 평소 자주 즐겨먹던 찌개를 시켜놓고 핸드폰으로 이메일을 검색하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기본 찬거리를 테이블에 놓으면서 꼬막을 작은 접시 한 가득 놓는다. “꼬막 좋아하시죠? 지금은 조용해서 다른 손님들도 없고 하니 꼬막 많이 드릴게요.” ‘아니, 내가 언제 이 식당에서 꼬막을 게걸스럽게 먹었던 적이 있었던가?’ 어쨌든 나는 그 아주머니의 그 말 한 마디에 그 식당의 단골이 되었다.


사업하는 사람은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식당 아주머니는 내가 꼬막을 좋아한다는 걸 메모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많은 손님들 중에서 내가 특별히 튀는 행동을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 아주머니는 평소 손님들의 취향을 기억하려고 노력을 했을 것이다. 기록한다고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 메모한다고 다 기억하는 것도 아니다. 기록과 메모는 기억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다. 한 번 보고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록하거나 메모를 하는 것이다. 그 식당 아주머니가 어디다 메모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아주머니는 내가 꼬막을 좋아한다는 걸 기억을 했고 그래서 단골을 확보했던 것이다. 뛰어난 사업가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언제 어떤 협상을 하게 될지 모른다. 사회는 학생처럼 범위가 정해진 시험을 치르는 곳이 아니다. 사회에는 시험범위도 없고 시험기간도 없다. 갑자기 협상테이블이 펼쳐지고 갑자기 협상이 시작된다. 길거리에서 반갑게 악수를 나누다가 난데없이 “지난 번 그거 좀 싸게 해줄 수 없어요?” 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언제 노트 펼치고 메모장 컨닝할 것인가? 그래서 사업을 하는 사람은 기록하고 메모하되 궁극적으로는 외워야 한다. 집에 있는 금송아지는 필요 없다. 집에 금송아지가 있는 사람 보다 지금 당장 은송아지가 있는 사람이 전투에서 이긴다. 요새는 모두 스마트폰이 있고 USB나 클라우드 같은 다양한 저장 공간이 있어서 수시로 자료를 검색할 수 있으니 굳이 모두 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자료를 검색하는 몇 초 사이에 전투는 끝난다. 제일 빠른 5G 서비스를 사용한다고 해도 늦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사업하는 사람이 꼭 명심해야 하는 대목이다. ‘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마라.’ 나는 누군가와 업무 협의를 하기 위해 상담을 가기로 약속이 되면 머릿속에 사전에 많은 시나리오를 그린다. ‘상대방이 이렇게 얘기하면 나는 저렇게 얘기하고......’ 시나리오가 많으면 많을수록 상대방의 예측하지 못한 반응에 덜 당황하게 된다. 전투에서는 먼저 당황하면 진다. 준비가 덜 되어 있으면 더 당황하게 된다. 상대방은 앞에 커피 잔 하나만 놔두고 청산유수로 떠드는데 나는 노트 펴놓고 메모장 뒤적이고 스마트폰 열심히 터치하고 있으면 그 전투는 진 것이다. 사업을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잘 봐라. 뭔가 자료를 펼치는 사람은 부족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결국 협상에서 밀리게 되어 있다. 사업의 초짜 표내지 않으려면 많이 외워서 상대방 앞에서 자신이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마라. 열심히 메모하고 열심히 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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