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정언명령과 한국 현대사
운명이란 생명체의 자유의지와 우주의 물리법칙이 서로를 관통하며 형성한 복잡한 연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의 연산 능력이 이 모든 변수를 공식에 포함시킬 수 있을 만큼 고도화된다면, 언젠가 운명은 계산 가능한 개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그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식"의 운명론을 믿어온 것은 그저 이 방대한 연산을 해낼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운명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가 급박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운명이란 것이 있긴 한가보다"는 생각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발전에 정해진 경로가 있다는 생각 말이다. 한국 근현대사에 오점을 남겨오던 권력 집단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를 청산한 후 우리나라에서 다시 군인이 집권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런데 군인 세력을 정리해도 여전히 남아있는 권력 집단이 많았다. 무력을 가졌고, 이를 사용하면 당연히 반감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군인들과 다르게 이들의 권력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떳떳하다. 언론과 법조 권력이다. 펜으로 사람을 죽여도 공익을 위한 일이라고 포장할 수 있고, 죄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버리게 만들어도 적법한 행위였다고 자위할 수 있는 권력이다. 그래서 이런 권력의 치부는 군처럼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만큼 사람들의 인식에서 이들의 권위가 무너지는 데는 많은 시대적 경험의 축적이 필요했고, 근래에 들어서 마침내 그 부당한 권위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군인 집단, 언론, 그다음은 검찰과 사법부까지 우리 사회의 폐단들이 차례로 시민들 눈에 공개되고 있다.
최근 사법부의 최고기관인 대법원의 이재명 선거법 사건 파기환송과 관련해서 많은 시민들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거두어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검찰이 하는 일이니 정당할 것이라는 믿음은 탄핵당한 한 대통령이 말끔히 깨부숴주었고, 판사가 하는 일이니 정의로울 것이라는 믿음도 조희대 대법원이 무너뜨리고 있다. 요즘은 "법을 아는 도적"이라는 뜻의 법비(法匪)란 멸칭까지 나돌고 있다. -개인적으로 퍽 기쁘지만 이 이야기를 길게 하려고 쓰는 글이 아니니 여기까지만 한다. - 이 대목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실정법까지도 신뢰할 수 없다면 무엇을 준칙으로 삼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인간 사회에는 어느 때에나 규칙이 있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당시 독일 법령에 근거한 일이며, 우리가 일제에 당한 학살과 수탈도 실정법 상으로는 전부 적법한 행위였다. 현대에 들어서는 법이라는 것이 더욱 고도화되어 머리를 아프게 만들지만, 그것이 꼭 정당하다거나 옳다는 증거는 없다.
예컨대 영양제를 의료, 보건 시장에서 엄청나게 팔리게 만든 것은 건강보조식품 산업계의 로비 때문이다. 94년 제정된 DSHEA 법(Dietary Supplement Health and Education Act of 1994)은 건강보조식품을 식품으로 분류해 FDA의 사전 승인을 받지 않도록 만든 미 연방법이다. 이 법에 의거해 영양제는 의약품이 아닌 식품으로 분류되어 훨씬 느슨한 규제를 받는다. 제조사들은 자사 제품이 "질병을 치료한다"는 주장만 하지 않으면 그 효과를 과학적으로 입증하지 않아도 판매할 수 있다. 미국 건강보조식품 산업은 매년 수천만 달러를 미 의회와 규제 기관들에 로비 자금으로 쓴다. 이 법안이 통과될 당시 주요 발의자 중 한 명이자 로비의 핵심 주체였던 이는 유타주의 공화당 상원의원인 "오린 해치(Orrin Hatch)"다. 자신이 영양제에 돈을 깨나 써왔다고 생각하는 분이라면 이 이름을 기억하시길 권한다. 자기 자신에 이어 탓해도 좋은 두 번째 사람이니까.
사회의 관념들 뿐만이 아니라 법까지도 옳은 것으로 신뢰할 수 없다면, 무엇에 의지하여 삶을 이어갈지 고민이 들 때마다 칸트를 생각한다. 그는 『실천 이성 비판』과 『도덕 형이상학 기초』에서 정언명령에 대해 소개한다. 첫 번째는 보편화의 정식이다. 당신의 행위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되게 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이 개념의 핵심은 내가 하려는 행동이 원칙이 모두에게 적용되어도 문제없을지 생각하라는 의미다. 만약 내가 지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면 남들도 그럴 수 있고, 모두가 이런 행동을 하면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너지는 상황이 벌어지므로 이것은 보편화가 불가능한 행위다.
두 번째는 자율성과 도덕 공동체의 정식이다. 자기 입법의 공식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당신의 의지가 보편적인 입법의 원리일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뜻이다. 칸트는 여기서 모든 도덕적 주체는 자신이 만든 법칙에 스스로 복종하는 자율적 존재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정리하면, 스스로 만든 도덕적 법칙에 의거하여 살아가되 그 법칙이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이다. "대형마트의 물건은 골목상권을 죽이는 대기업의 횡포이니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좋다"라는 도덕 준칙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사실 칸트는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곧잘 받지만 도덕을 내면의 이성과 자율에 근거하려는 시도는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칸트에 따르면 자신의 준칙을 제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생각하는 대로 산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스스로의 준칙을 만들고 이에 따를 수 있으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지성이 필요하다. 도덕적 사유능력과 현실 감각 모두가 필요한 일이니까. 이것이 바로 공부하고 생각하는 이유라고 믿는다. 돈이 삶의 거의 전부인 세상이니 오직 돈을 좇는 것을 준칙으로 삼는 사람이 많아져도 수긍한다.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다만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경우, 대세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스스로의 정언명령이 필요하다. 부처는 입적할 당시에 제자들에게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의심하고, 오직 자기 자신에 의지하여 나아가라고 했다. 훌륭한 말씀이지만 제자들이 쉽게 수긍했을지는 모르겠다.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은 의심하기 어렵고, 그에 비하면 한미한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여 정진하기에는 불안했을 테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의 준칙을 세우고 그에 의지하기에는 내 지적 능력이 심히 의심스럽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공부하는 이유로 삼기로 결정했다. 세상에는 어느 때나 그 시대의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이 언제나 옳지는 않다. 그렇다면 나는 나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규칙을 찾아간다. 다만 나의 규칙이 정당한 것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