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니면 내일은 못 갈 소풍
나들이 음식, 김밥 2
엄마가 너희를 키우면서 칭찬에 인색하기 짝이 없는 너희 아빠가 참 잘했다고 해주고 스스로도 만족해하는 것이 한 가지 있어. 너희들이 어릴 때 무엇이든 되도록 미루지 않고 그 자리에서 뚝딱 해줬다는 거야. 어느 날 아침에 눈 뜨고 밀가루 놀이를 하고 싶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반죽해 주고, 커다란 상자를 보고 놀이 집을 만들고 싶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뚝딱 만들게 하고. 별 것 아니라고? 아빠도 마찬가지고 엄마한테도 이건 굉장한 파격이었어. 우린 돌다리도 두드리고 두드리다 못 건너고 빙 돌아가는 사람들이거든. 2박 3일 해외여행이라도 가려면 한 달 이상 준비해야 하고 정작 여행 가서는 지치고 시들 해져서 별 재미를 못 느끼지.
그런 엄마가 너희들, 특히 네가 어렸을 때 원하는 것만큼은 그 즉시 해줬단 말이야. 검토하고 계획하고 준비하고 다시 점검하고 또 확인하고 …… 를 모두 생략하고 당장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만큼만 대충이라도. 물론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했지만 할 수 있는데 준비해서 다음에 하자고는 안 했어.
네가 김밥 싸가지고 소풍 가고 싶다고 하면 햄, 맛살, 오이, 당근, 단무지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김밥을 싸니, 아기 봐줄 사람도 없고 날씨도 험한데 어떻게 소풍을 가니, 다음에 시장 봐 놓고 날씨 좋은 날 잡아서 가자. 이러면 절대 못 간다는 걸 알았거든.
그냥 소풍은 오늘 아니면 내일 갈 수 있지만, 다섯 살의 소풍은 오늘 아니면 내일은 갈 수 없는 소풍이었거든. 너희는 매일 자라고, 너희의 어린 시절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니까 오늘의 소풍을 내일의 소풍이 대신할 수 없는 거지. 그러니까 참기름에 밥 비벼서 김에 둘둘 말아 도시락 싸 들고 베란다라도 나가는 거야. 베란다에 돗자리 깔아 놓고 도시락 펴 놓고 소풍놀이를 가는 거지.
그런데 엄마가 이 나이에 이르러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처지가 되고 나자 그게 꼭 쑥쑥 자라는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어. 어른들에게도 오늘 못 간 소풍을 언젠가 다시 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고, 오늘의 소풍은 내일의 소풍이 대신할 수 없더라.
20대의 어느 날 내가 놓쳤던 책은 다시 읽을 기회가 오지 않고, 30대의 어느 날 내가 올라 보지 못한 산은 다시 오를 기회가 오지 않고, 40대의 어느 날 내가 찾아보지 않은 친구는 다시 만날 기회가 오지 않기도 하더라고. 그리고 가속도가 붙은 세월은 저 혼자 달려가고 모든 기회는 생의 유한성에 잡아 먹히더라.
아들, 엄마는 네가 어느 정도 계획적이고 자기 관리가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삶의 즉흥성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함은 너를 옭아매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삶의 활력은 계획성이 아니라 즉흥성에서 나오는 거야.
지난번에는 이 얘기 저 얘기 길어져서 정작 김밥 만들기는 시작도 못 해봤지. 이번엔 잔소리 그만하고 본격적으로 김밥 싸기 노하우를 전수해 볼 게.
김밥 재료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준비에 손이 많이 가고 번거로운 것들이 있어. 계란지단, 우엉조림, 시금치.
우선 계란지단은 식감을 위해 필요한 재료야. 햄, 맛살 들어갔으니 맛에서는 계란 지단 빠져도 크게 문제없고 색감으로 봤을 때도 치자 물들인 단무지를 쓰면 노란색은 충분해. 하지만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계란지단의 식감을 대체해줄 재료는 없거든. 두툼하게 부친 계란지단이 가운데 자리를 턱 잡고 있어야, 자칫 목이 메기 쉬운 김밥이 부드럽게 씹히고 넘어가.
계란 지단은 두툼하게 부치는 게 중요하니까 계란말이용 팬에 달걀물을 충분히 부은 뒤에 약불에서 숟가락이나 젓가락으로 스크램블 만들듯이 살짝 저어서 윗부분까지 골고루 반숙을 만들어야 해. 그런 다음 밑면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집어야 하는데, 욕심 낼 필요 없어. 어차피 잘라 쓸 거잖아. 자신 없으면 반 잘라서 반은 들어내 놓고 나머지 반만 뒤집어서 마저 익히고 다른 반쪽 다시 익히면 돼.
우엉조림은 맛의 중심을 잡기 위한 재료야. 그래서 굳이 우엉 절임이 아닌 우엉조림을 쓰라는 거야. 엄마 생각에 김밥 맛의 두 축은 단무지와 우엉조림이 잡고 있는 것 같아. 단무지가 새콤달콤 자극적인 맛으로 입맛을 돋운다면 우엉조림은 달콤 짭조름한 감칠맛으로 뒷맛을 맡아주지. 이 새콤함과 짭조름함의 조화가 무너지면 맛없는 김밥이 되는 거야.
우엉조림은 생우엉을 사다가 껍질 벗겨 필러로 채를 썰어서 졸일 수도 있고, 우엉채를 사다가 졸일 수도 있지만 그냥 졸여서 파는 걸 쓰라고 하고 싶어. 반찬가게에서 파는 우엉조림 중에는 간장 국물이 흥건하거나 진득진득 물엿을 들이부어 놓은 것도 있으니까 잘 골라서 적당히 달콤 짭짤하면서 아삭한 식감이 살아 있는 걸 골라봐.
굳이 우엉을 졸이고 싶다면, 생우엉을 다룰 때는 장갑을 꼭 끼고 갈변이 심하니까 채 썰 때는 찬물에 담가놓고 작업하는 게 좋아. 채를 다 썰었으면 식용유에 살짝 볶은 다음 졸이는데, 특별한 양념이 필요한 건 아니고 물, 간장, 설탕 정도만 넣고 뭉근하게 오래(20분 이상) 졸이는 게 핵심이야. 물엿은 마지막에 넣고.
마지막으로 시금치는 색을 위한 재료야. 오이는 그냥 놓고 봤을 때는 푸른색이 충분하지만 김밥을 말아 잘라 놓고 단면을 보면 많이 부족하거든. 시금치를 넣고 싼 김밥은 쉽게 상하고, 다듬고 씻고 데치고 무치는 과정도 번거로워. 이렇게 다루기 까다로운 재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쁜 김밥에는 시금치가 필요하니 한 번 시도해 봐. 그럼 다음에 참나물, 비름나물 등 데쳐서 무치는 다른 나물들도 쉽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시금치는 섬초나 포항초가 맛있으니 참고하고, 뿌리 끝부분을 칼로 살짝 잘라낸 다음 큰 그릇에 담아 흐르는 물에 충분히 씻어 줘. 그다음 팔팔 끓는 소금물에 잠깐 데쳐줘야 하는데, 시금치를 넣은 다음 천천히 셋 세고 한번 뒤집어 주고 다시 셋 세고 건지면 돼. 건져낸 시금치는 찬물에 씻어서 재빨리 온도를 낮춰주고 물기를 꼭 짜줘. 나물을 할 때 보다 김밥에 넣을 때는 물기를 더 꼭 짜는 게 좋아.
나물을 무칠 때는 파, 마늘, 진간장, 액젓, 참기름 정도를 넣는데 김밥에 넣을 때는 소금으로 간만 맞추고 참기름만 약간 넣어서 무치는 게 좋아. 굳이 자를 필요도 없고.
이 밖에 필요한 재료에는 단무지, 햄, 맛살, 당근 정도가 있어. 어묵은 우엉조림과 맛살이 들어갔으니까 빼도 돼.
우리 집에서는 김밥용 햄 대신 주로 스팸을 썼지. 스팸은 염도가 높기 때문에 밥을 간 할 때 조금 싱겁게 해야 해. 너무 굵게 썰면 아무래도 짠맛이 강하고 가늘게 썰면 쉽게 부서지니까 적당한 두께로 써는 게 중요해. 작은 스팸 한 통을 12토막 정도 내면 적당한 것 같아.
일반 맛살은 반 갈라서 팬에 살짝 구워주는 게 맛있고, 토막으로 나오는 고급 맛살은 그냥 써도 괜찮아.
당근은 굵은 채칼로 채를 썰어야지 오이처럼 길게 잘라 쓰면 안 돼. 채 썬 당근은 기름에 볶아주는데 설 볶으면 맛도 식감도 어정쩡하니까 투명해질 때까지 충분히 볶아야 하고, 간을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볶을 때 소금을 약간 뿌려주면 단맛도 더 올라오고 색도 더 예뻐져.
여기까지는 기본 재료고 우리 집에서 많이 해 먹던 참치김밥이나 치즈김밥을 만들려면 참치, 마요네즈, 깻잎, 슬라이스 치즈 정도가 더 있으면 돼.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밥. 밥은 너무 되거나 질지 않게 딱 정량의 물을 맞추고, 전기압력 밥솥의 무압 조리 코스를 선택해서 해야 해.
밥이 완성되자마자 잘 저어주고 소금을 뿌려 둬. 급하다고 밥에 소금을 뿌리자마자 비벼서 간을 보면 십중팔구 짠 김밥을 먹게 돼. 소금이 녹아 밥에 스며드는데 시간이 필요하니까 이대로 한 김 나가도록 뒀다가 다시 참기름을 넣고 비벼 주면서 간을 맞추면 돼. 그리고 참기름은 절제해서 써야 해. 참기름이 맛있다고 많이 넣으면 느끼할 뿐 아니라 약간 씁쓸한 맛이 올라올 수 있거든. 조금 부족한 듯싶게 넣어 줘.
밥을 비빌 때는 되도록 넓은 그릇에 담고, 주걱을 눕히지 말고 세워서 비벼야 밥알이 으깨지지 않고 빨리 비빌 수 있어. 하지만 비빈 다음에는 다시 깊은 그릇에 담아 온기를 오래 보존해야 하니까 귀찮으면 그냥 밥솥에서 비벼. 밥 비빌 때 통깨를 같이 넣어도 돼.
김밥을 많이 싸야 하는데 싸는 속도가 느리다면 밥을 반만 먼저 비벼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보온하고 있다가 다시 비벼 쓰는 게 좋아. 밥이 식으면 김밥 말기가 더 어렵거든.
이제 재료 준비는 끝났으니 김밥을 싸 보자. 아! 김이 빠졌네. 김밥용 구운 김은 비슷비슷한 것 같더라고. 그냥 적당히 골라서 사 오면 되고 보관할 때만 냄새, 습기 안 들어가도록 조심하면 돼.
김에도 앞뒤가 있고 가로 세로가 있는 거 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엄마가 딱 정해 줄게. 김은 반들반들한 면이 앞면! 그러니까 재료는 광택 없는 면에 올려서 싸야 하겠지. 짧은 쪽이 가로, 긴 쪽이 세로! 김밥은 짧은 쪽을 가로로 놓고 싸는 거야.
김발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이것도 엄마가 딱 정해 줄게. 실리콘 김발 쓰기.
초보일수록 김발을 이용해서 싸야 해. 김발이 없으면 전체에 고루 힘이 가기 어려워서 어느 부분은 꽉 눌리고 어느 부분은 느슨하게 풀리는 경우가 많아.
대나무 김발이 잘 싸 지기는 하지만 관리가 어려워. 솔로 틈새를 잘 닦고 소독하고 그늘에서 바짝 말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거든. 푹푹 삶아 쓸 수 있는 실리콘 김발 추천.
자, 이제 정말 김밥을 말 시간이야. 김발에 김을 올려놓고 비벼 놓은 밥을 한, 두 주걱 떠서 가볍게 뭉친 다음, 김 가운데에 올려줘. 밥 양은 네 손 하나에 들어갈 만큼, 야구공 정도 크기로 뭉치면 될 거야. 그런 다음 밥을 골고루 펼쳐 주는데 너무 가장자리까지 채울 필요는 없고 0.5 센티미터 정도 씩 비워줘. 너무 꽉 채우면 싸 놨을 때 밥이 김 밖으로 빠져나가 지저분해 보일 수 있거든.
그리고 엄마는 밥을 적게 넣고 김밥을 작게 만들기 때문에 세로로 끝의 2~3센티를 남기는데 밥이 뜨거울 때는 상관없지만 식었을 때는 끝에 남긴 김이 잘 붙지 않고 덜렁거릴 수 있어. 이건 밥풀을 군데군데 붙여서 고정할 수도 있고 물을 살짝 묻혀서 고정할 수도 있어.
밥을 깔았으면 준비한 재료들을 올려놔야 하는데, 쉽게 싸려면 재료들을 아래쪽(나와 가까운 쪽)에 쌓아 올리듯 몰아 놓고 마는 게 좋아. 전문점 김밥처럼 재료들이 정확히 가운데 오도록 싸겠다는 생각하지 말고, 밥과 김이 달팽이 모양으로 말리고 재료들이 약간 한쪽으로 쏠리게 말겠다고 생각하면 돼.
김발을 처음 써보면 도대체 이걸 어쩌라는 건지 감이 안 잡혀 김발까지 같이 말아 버릴 수도 있어. 한 바퀴 돌아서 김과 밥이 붙기 시작할 때 재빨리 김발을 빼내야 하는데, 어려우면 그냥 손으로 대충 말아 놓은 다음 김발에 싸서 다시 골고루 눌러서 제대로 붙여줘도 돼.
김밥을 너무 꼭꼭 눌러 싸면 맛이 떨어지고 너무 느슨하게 싸면 풀려 버리니까 적당한 힘 조절이 필요해. 힘자랑하지 말고 살짝살짝 눌러줘.
김밥을 다 싼 다음에 표면에 참기름을 바르고 깨를 뿌리는 경우도 있는데 엄마는 깔끔하게 기름만 바르는 게 좋더라. 기름 솔 없어도 비닐장갑 낀 손바닥에 참기름 한 두 방울을 올려놓고 그걸로 김밥 표면을 살짝 문질러 주면 돼.
썰 때는 칼에 기름을 발라주면 밥풀이 들러붙는 걸 막을 수 있고, 한 번에 자르려고 들지 말고 톱질하듯 칼을 왔다 갔다 움직여 가면서 잘라줘야 해. 전문점 김밥은 크게 말아 얇게 써는데, 집에서는 좀 작게 말아 도톰하게 썬다고 생각하면 어려울 것 없어. 김밥 한 줄을 여덟, 아홉 토막 정도 낸다고 생각하면 돼.
김밥이 완성됐으니 예쁜 도시락에 담아서 들고 소풍을 가야지, 오늘 아니면 내일은 못 갈 소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