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음식, 잡채 2
잔치음식, 잡채 2
잡채는 우리나라 잔치 음식의 대표라고 불 수 있어. 제사상에는 오르지 않고 명절에는 하는 경우도 있고 안 하는 경우도 있지만 잔치상에는 꼭 오르는 게 잡채잖아. 잡채는 다양한 변형도 가능한 음식이야. 해물 잡채, 버섯 잡채, 어묵 잡채, 떡 잡채, 우엉 잡채, 콩나물 잡채 등등 온갖 음식이 잡채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지. 이 중에는 당면이 들어간 것도 있고 안 들어간 것도 있고, 간장 양념으로 버무린 것도 있고 다른 양념을 쓴 것도 있어. 그럼 과연 잡채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1670년 경에 쓰인 [음식디미방]이라는 한글 조리서에 잡채가 등장하는데, 당시의 잡채에는 당연히 당면이 들어가지 않았고 고기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해. 대신 요즘의 잡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다양한 채소와 버섯 들을 어떤 것은 날 것으로 어떤 것은 익혀서 사용했다고 나와. 여러 채소를 섞어 넣었다는 의미에서, 숙채(익혀서 조리한 채소)와 생채(생으로 조리한 채소)를 섞었다는 의미에서 잡채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아. 잡채의 양념도 지금처럼 간장 양념이 아니라 즙장을 뿌려 먹었대. 즙장은 고기 국물에 된장 등의 양념을 한 걸쭉한 소스라고 해.
그 뒤의 기록들을 따라가 보면, 채소의 종류는 좀 줄고 육류가 더해졌어. 그러다 당면이 들어가는 지금의 잡채를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당면 제조가 산업화된 뒤라고 해.
잡채를 우리 전통 음식이라고 하지만 당면이 들어가는 잡채의 역사는 의외로 짧은 편이지. 당면만 그럴까? 잡채에 들어가는 다른 재료들도 살펴보자. 지난 글에서 가장 일반적인 잡채의 재료로 당면, 양파, 당근, 표고버섯, 돼지고기, 시금치 또는 부추가 사용된다고 했어.
이 중 표고버섯은 우리나라가 원산지야. 양념으로 쓰는 마늘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그 마늘과 지금 우리가 먹는 마늘이 다르다지만, 이집트나 중앙아시아가 원산지라는 지금 우리가 먹는 마늘에 대한 기록도 삼국사기부터 나온대. 대파는 중국에서 들여와 적어도 통일신라시대부터 먹었다고 하고. 돼지고기 또는 소고기는 품종까지 따지고 들자면 한없이 복잡해지겠지만 돼지와 소를 사육한 것 기준으로 보면 부여에 마가, 우가, 저가, 구가라는 관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이겠지.
문제는 그다음부터야. 시금치는 페르시아가 원산지이고 중국을 거쳐 조선 초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아프가니스탄이 고향인 홍당무, 당근은 16세기부터나 재배하기 시작했대.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배추 다음으로 많이 먹는다는 양파는 서아시아가 원산지이지만 유럽, 미국을 돌아 조선말 서양 문물이 쏟아져 들어올 때에 첫 선을 보였고.
그런데 엄마 기억에 어릴 적 할머니가 만드신 신선로에는 당근이 들어가지 않았어. 신선로는 오방색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음식이고 당근은 손쉽게 붉은색을 낼 수 있는 흔한 식재료인데도 쓰지 않으셨어. 대신 실고추를 쓰셨고, 푸른색은 미나리를 쓰셨어. 잡채에도 시금치를 쓰지 않고 오이를 돌려 깎아 채 썰어 쓰셨어.
왜 그러셨을까? 이미 돌아가신 지 40년이 가까워 오니 여쭤볼 수도 없고 만약 생전에 여쭤 봤어도 그냥 원래 안 쓰는 거라는 대답 정도가 돌아왔을 거야. 궁금하던 차에 서울시가 서울 토박이들을 인터뷰해 엮어낸 책에서 1934년생 김숙년 할머니도 당근이나 시금치는 일제 강점기에나 먹기 시작했다고 구술하신 것을 봤어.(서울 사람이 겪은 해방과 전쟁』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92,93 페이지) 20세기 벽두에 태어나 서울에서 살림을 배우신 너의 외증조할머니한테 당근이나 시금치는 익숙하지 않거나 적어도 전통음식에 쓰기 꺼려지는 식재료였던 거였어.
시금치가 조선 초에, 당근이 16세기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고 해도 그건 문헌에 등장할 뿐이지 광범위하게 재배되고 식재료로 쓰일 때까지는 몇 백 년이 걸린 거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제주도에서 말먹이로 키우기 시작한 당근이 기근이 드니까 구황작물로 이용되고 일부 지방에서는 더러 식재료로 사용하기도 하다가 외래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근대에 비로소 한양의 부엌에까지 도달하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지구 반대편의 식재료도 한 번 유행을 타면 순식간에 집집의 식탁에 올라앉을 수는 없었지만, 더디고 보수적인 듯하면서도 꾸준히 섞이고 모여서 우리의 음식이 된 거야.
사실, 잡(雜)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말 중에 좋은 것은 별로 없어. 잡배, 잡놈 등에서 처럼 격이 낮다는 노골적인 멸시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고, 과거 시험 중의 잡과나 잡초, 잡어, 잡념, 잡기 같은 단어에는 멸시까지는 아니지만 기타 등등의 비주류라는 차별과 평가절하가 담겨 있고.
하지만 음식 이름에 붙는 잡(雜)이라는 접두어는 두 가지 이상이 섞였다는 것만 진술하고 있을 뿐 상당히 중립적인 것 같아. 잡채도 그렇고 잡산적, 잡과병 등도 그다지 가치 판단이 들어간 음식 이름은 아닌 것 같거든. 처음부터 그랬는지, 처음에는 약간 비하의 의미가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며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음식이 잡것에 대해 개방적인 이유는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 순혈이냐, 혼혈이냐, 아예 외래종이냐는 문제 되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유럽인들은 돼지나 먹이는 비천한 음식, 악마의 열매라고 멸시하고 두려워하던 감자나 토마토조차도 먹을 수밖에 없었고 먹다 보니 그들의 문화가 되어 입맛에 맞는 요리들을 탄생시켰어. 아메리카 대륙의 백인들은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이나 검보 같은 흑인 노예의 음식을 수용했어. 굶주림이 그 모든 편견을 이겨냈고, 배고픔 못지않게 힘이 센 것이 맛에 대한 욕망이었기 때문이야.
잡채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음식들이 많은 '雜'(잡: 섞이다. 섞다, 만나다, 모으다, 함께)의 결과물이야. 여러 식재료가 스며들고 어우러질수록 맛은 깊어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잡’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음식들이 괄시를 이겨내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단순히 혼합하는 것이 아니라 섞여서 서로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맛을 창출해내는 것, 그 끊임없는 긍정적 상호작용이 인류를 인류이게 한 거야.
우리 집 잡채는 기본 재료에서 돼지고기 대신 소불고기 사용하기도 하고, 표고버섯과 함께 목이버섯을 넣고, 한여름이 아니면 시금치를 부추보다는 선호해. 이제 이 재료들로 본격적인 잡채 조리에 들어가 보자.
지난번에 대략적인 순서를 잡아 놨기 때문에 오늘은 몇 가지 주의할 점 위주로 짚으면 될 것 같아.
우선 재료의 비율을 잘 맞춰야 해.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재료를 더 넣을 수도 있지만 되도록 재료들이 색과 맛과 식감과 향까지 두루 어우러질 수 있도록 적당량을 안배해야지 어느 한 가지를 지나치게 많이 넣으면 안 돼. 예를 들어 표고버섯과 목이버섯을 함께 넣으면서 거기에 고기도 소고기를 쓸 경우, 이 세 가지 재료들이 모두 비슷한 색으로 보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음식이 전체적으로 아주 칙칙해질 수 있으니 조금 적은 듯하게 넣어야 해.
다음은 버섯 손질 방법을 알려 줄게. 표고버섯은 생표고도 맛있지만 건표고버섯을 불려서 사용하면 맛과 향이 모두 진해지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건표고 향을 싫어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취향에 맞춰 선택하면 돼. 표고버섯을 불릴 때는 미지근한 물에 설탕을 좀 타기도 하는데 그냥 찬물에 불려도 상관없고, 가운데 덜 불어 단단한 부분이 남지 않도록 충분히 불려 주기만 하면 돼. 표고버섯 불린 물을 요리에 쓰기도 하는데, 잡채에는 국물이 필요 없으니까 그냥 다 불리 다음에 찬 물에 가볍게 씻고, 기둥을 떼어낸 다음에 꼭 짜주면 돼, 표고버섯 기둥은 멸치 육수 낼 때 같이 넣고 끓이면 좋으니까 끝의 지저분한 부분을 떼어내고 따로 냉동 보관해 둬.
목이버섯은 오돌오돌 씹는 맛이 좋은 버섯으로, 생목이버섯도 있고 건목이버섯도 있는데 맛에서 큰 차이는 나지 않으니까 어떤 걸 선택해도 상관없어. 다만 뿌리 쪽이 약간 지저분하니까 꼼꼼하게 다듬어 버려야 해. 목이버섯은 연해서 칼질도 필요 없고 손으로 한 두 번 찢어서 써도 충분해.
시금치와 당근은 김밥 쌀 때 이미 다뤄본 채소야. 김밥과 같은 방식으로 조리하면 돼. 시금치는 따로 무치지 않고 마지막에 함께 버무려도 충분해. 만질수록 숨이 죽으니까 되도록 건드리지 말고 물기만 충분히 빼서 적당한 길이로 썰어 둬.
고기는 기본적인 불고기 양념(간장, 설탕, 후추, 다진 마늘, 대파, 참기름, 돼지고기의 경우 다진 생강과 맛술 등)을 해서 잠깐 재 놨다 쓰면 돼. 국물이 없이 고슬고슬 볶아야 하니까 양파나 과일 등을 갈아 넣지는 말고, 잡채의 다른 재료에는 마늘, 파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엄마는 고기에 마늘, 대파를 넉넉히 넣는 편이야.
볶을 때는 조금 센 불에서 물기 없이 볶아내는 게 중요하고, 팬 하나로 모든 재료를 다 볶으려면 순서를 꼭 지켜야 해. 흰색의 양파를 먼저 볶는데, 엄마는 이때 목이버섯도 같이 볶아 줘. 둘이 익는 시간도 얼추 비슷하고, 목이버섯은 깔끔하게 볶는 게 좋거든. 다음에는 붉은색이 기름에 배 나오는 당근을 따로 볶아. 그다음에 간장 양념을 한 고기를 볶는데 이때 표고버섯을 함께 볶아줘. 버섯을 따로 양념에 재 둘 필요까지는 없고, 양념이 된 고기와 함께 볶으면 살짝 맛이 배는데 표고버섯은 간장 양념과 잘 어울리거든.
이쯤에서 아들이 볼멘소리를 하는 게 들리는 것 같아. 어차피 다 섞을 건데 한꺼번에 볶지 귀찮게 따로따로 볶을 게 뭐 있냐고. 물론 한꺼번에 볶을 수도 있어. 적은 양을 할 때는 익는 순서를 고려해서 재료를 순서대로 넣어가며 한꺼번에 볶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어. 하지만 서로 다른 재료를 한꺼번에 조리하면서 균일하게 익혀 낸다는 게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상의 양을 조리할 때는 따로 볶는 게 더 편해. 재료들을 각각의 특성에 맞춰 대접해 줘야 최상의 맛을 끌어낼 수 있는 거야.
이제 마지막, 잡채 조리의 핵심! 당면을 어찌할 것인지 알아보자. 당면 조리 방법에 대해서는 비법이 많기도 하지만 엄마는 할머니들이 하시던 방식, 옛날 방식 그대로 요령 없이 조리하는 게 제일 실패 확률이 낮더라. 그냥 끓는 물에 당면을 넣고 삶아서 찬물에 헹구고 기름 두른 팬에 볶는 거야. 기름을 많이 쓰지 않으려면 면의 물기를 충분히 빼 주고 코팅이 잘 된 팬에서 먼저 기름 없이 볶아주는 거야. 수분이 증발하고 면이 팬에 눌어붙기 시작할 때쯤에 기름을 두르고 재빨리 저어서 면에 두루 기름 코팅을 해줘. 그런 다음 간장과 설탕, 물엿을 넣어서 면에 간이 밸 때까지 잘 저어가며 잠깐 졸여 주는 거야.
식기 전에 모두 섞어서 버무려줘야 맛이 잘 어우러지는데, 주의할 점은 시금치를 뜨거운 재료들과 함께 버무리면 색이 죽을 수 있다는 거야. 시금치는 맨 마지막에 넣고 살짝 버무려 줄 것. 버무릴 때는 간장, 설탕으로 간을 맞추고 참기름, 통깨를 뿌려줘. 취향에 따라 후추나 다진 마늘을 살짝 넣기도 하고, 참기름만으로는 윤기가 부족하니까 설탕과 함께 물엿을 좀 넣어 주기도 해.
아들, 좋은 날 네가 꾸릴 새로운 가족, 너의 소중한 친구들과 서로 스며들고 어우러져 함께 성숙해지는 시간 가질 수 있기를 엄마가 기원할게. 너만의 비법을 보태서 잡채도 맛있게 만들어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