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유고 시집은 제목이 미리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작가가 생전의 마지막 시집을 내고 난 후 다음 시집의 제목은 '충분하다'로 정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고령이었던 작가는 제목부터 지어 놓은 이 시집을 완성하지 못한 채 작고 했고, '충분하다'는 결국 유고 시집으로 출판됐다.
더구나 그가 남긴 작품 중에는 표제작 '충분하다'가 없었다. 미완성 원고 중에 짐작이 가는 것은 있지만 완성된 원고로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가 과연 무엇이 충분하다고 한 것인지 우리는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말한 ‘충분하다’는 살만큼 살았다는 의미였을까?
입원 기간이 길다 보니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고, 좁은 병실에서 원치 않아도 그들의 사생활을 엿들을 수밖에 없다. 암병동에도 의외로 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다인실에는 20, 30대부터 80대까지 한 병실에 모여 있는 경우도 있다.
완치율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암은 죽음이 침상 곁에 바짝 붙어서 있는 병이다. 아무래도 젊은 환자들은 더 안타깝고, 젊은 환자를 돌보는 부모나 어린 자식을 둔 환자는 더 눈물겹다.
그렇다면 노인은? 얼마나 오래 살고 나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간혹 삶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노인들도 있다. 그들은 충분히 오래 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호상이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나이에 따라 누군가의 죽음을 연민하는 데 차등을 두어왔다. 이 또한 아직 죽지 않은 이들의 참 둔감하고 가혹한 잣대가 아닐까.
혹은 그녀의 ‘충분하다’는 원하는 것을 다 이루고 할 일을 다 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삶을 만끽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순간순간의 감각과 느낌과 지적 성취 등을 두루 만족할 만큼 경험했다는 뜻.
하지만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이루거나 경험해야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몇 주 동안 쉼보르스카의 ‘충분하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봤지만 결론은 내리지 못했다. 솔직히 나는 아직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최악의 ‘충분하다’를 경험하게 될까 봐 겁이 나기도 한다. 병마에 시달리며 지쳐서 고통은 이제 충분하다고 내뱉는 그 ‘충분하다’ 말이다.
그렇게 두렵고 간절할 때는 이미 죽은 자들을 생각한다. 죽으면 그들이 나를 마중 나오고 먼저 간 모든 이들을 만날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은 참 따뜻한 위로가 되어 준다. 좀 더 이성적으로 망자가 망자와 해후하는 사후 세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들도 나름의 마지막을 겪어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조금은 의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