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 괴담
떡볶이는 의외로 까다로운 음식이다. 맛도 맛이지만 모양을 내고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진열해 놓고 끓여가며 판매하는 경우는 관리가 아주 어렵다. 살짝 덜 졸이면 양념이 겉돌아 맛없어 보이고 조금만 잘못 끓이면 떡이 퉁퉁 불어 보이기도 한다.
떡볶이는 조명발을 잘 받는 음식이기도 하다. 똑같은 떡볶이도 어두운 곳에 둘 때와 밝은 조명 아래 둘 때 전혀 다른 음식처럼 보인다. 선명한 붉은색의 음식이기 때문이다. 당분으로 광택을 입은 고춧가루의 붉은색이 적당한 조명을 받으면 저절로 눈길을 끌어당기고 식욕을 돋운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 새빨간 떡볶이를 보통 고추장 떡볶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떡볶이 소스에 고추장이 그리 많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미분 고춧가루 10kg / 다시다 2kg / 생강가루 120g / 물엿 24kg / 케첩 6.6kg / 맛소금 300g / 소금 300g / 설탕 1.8kg / 양파 10개 / 마늘 2kg / 고추장 400g / 디포리 국물"
내가 1997년도에 떡볶이 장사를 시작하면서 누군가에게 넘겨받은 떡볶이 소스 배합비이다. 고추장은 정말 넣는 시늉만 할 정도로 들어갈 뿐이다.
떡볶이 소스에 고추장을 많이 넣으면, 특히 오래 끓여야 하는 쌀떡볶이의 경우 맛이 텁텁해진다. 또, 전체적으로 묵직한 맛이 나기도 하는데 물론 이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고추장은 비싸다. 아무리 밀가루로 만든 양조 고추장이라고 하더라도 고춧가루로 직접 소스를 만들어 쓰는 것보다 비싸기 때문에 떡볶이 장수들은 고추장 떡볶이를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떡볶이의 붉은색은 고춧가루에서 나온다. 떡볶이가 불량식품으로 지목받는 결정적 이유 중 한 가지가 여기에 있다. 떡볶이는 값싼 음식이니 만들어 파는 사람들은 값싼 재료를 찾을 수밖에 없는데, 색깔이 선명한 고급 고춧가루는 값이 비싸고 값싼 고춧가루에는 색소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인체에 유해한 타르 색소를 섞어 만든 불량 고춧가루에 대한 기사는 1960년대부터 끊임없이 신문에 등장한다. 6,70년대에는 고춧가루에 톱밥 등을 섞고 여기에 타르 색소로 색을 낸 가짜 고춧가루가 적발됐고, 80년대까지도 질이 낮은 고춧가루에 색소를 섞어 파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90년대 들어서는 국산 고춧가루의 색소 첨가 보도는 사라졌지만 중국산 고춧가루에서 타르 색소가 검출됐다가는 기사가 많았다.
“너희들 떡볶이 뭘로 만드는 줄 알아? 떡볶이 빨간 양념이 고춧가루일 것 같아? 그거 벽돌 빻아서 만든 거야. 그런 거 먹으면 죽어.”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80년대 초반 어떤 선생님이 교단에서 말한 내용이다.
당시 떡볶이에 들어가는 고춧가루의 질이 믿을 만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벽돌 가루라니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무척 고민스러웠다. 그래도 떡볶이는 먹고 싶으니까 이런 협박을 들은 날 방과 후에도 떡볶이를 사먹으면서 친구들과 ‘설마’를 반복했다. 당시 중학생들은 떡볶이를 먹더라도 노점에서 보다는 분식점에 제대로 앉아 즉석에서 끓여 먹는 떡볶이를 즐겼다.
옛 신문들을 뒤진 끝에 벽돌 가루 고춧가루에 대한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부정 식약품의 실태를 다룬 1969년 6월 7일 자 경향신문 기사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부정식품과 부정 약품을 생산 판매하는 자에게는 그 죄질에 따라 극형에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내각에 긴급 지시했다는 보도가 주요 내용인데 도입부에 벽돌가루로 늘린 고춧가루라는 언급이 나온다. 아마도 양을 늘렸다는 의미일 텐데 실제로 이런 사례가 있었는지는 찾을 수 없었다.
터무니없게도 그 선생님은 실재했는지도 불분명한 십 수년 전 범죄를 끌어다 합법적으로 영업하고 있는 음식점의 모든 떡볶이를 매도한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시절 선생님들은 대부분 떡볶이를 싫어했다. 같은 분식점에서 파는 만두나 라면 등에 대해서는 별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 유독 떡볶이에 대해서만 잔소리가 심했다.
당시 중학생들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입던 교복을 그대로 입는 학교가 많았다. 여학생들은 넓고 흰 카라를 덧댄 감색 재킷에 치마를 입었다. 교복은 여러모로 불편했지만 가장 성가신 것은 흰색 카라였다. 새하얗고 빳빳한 카라를 달고 등교해야 복장 단속에 걸리지 않았는데, 그 뻣뻣한 카라는 여학생들의 여린 목덜미 피부를 긁어 댔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면 흰 카라에 김칫국물이 튀는 일도 잦았다. 선생님들은 흰 카라에 조금이라도 얼룩이 보이면 떡볶이 국물을 묻히고 다닌다고 노발대발하셨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염려였을까, 혐오였을까?
아마도 염려가 미량 섞인 혐오였을 것이다. 이제 나는 좀 더 대담하고 발칙한 추론을 해보고 싶다.
떡볶이는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좋아하는 음식이다. 요즘도 그런 편이지만 예전에는 확실히 그랬다. 어렸을 때야 다 같이 먹지만 조금만 나이를 먹으면 남자들은 떡볶이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만약 남자들이 떡볶이를 좋아했고 여자들은 그저 따라가 먹는 정도였다면 어땠을까? 그 시절 그렇게 떡볶이를 혐오하던 선생님들의 태도가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아마도 소주라도 한 잔 곁들이지만 않는다면 선생님들은 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들이 못마땅해했던 것은 떡볶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여학생이 빵집에 앉아 얌전히 단팥빵을 오물거렸다면 앞에 남학생이 같이 앉아 있지 않는 한 그리 노발대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떡볶이가 빨갛지 않고 점잖은 다갈색의 간장 양념을 뒤집어쓰고 있었다면, 순백의 크림소스에 버무린 것이었어도 선생님들이 그렇게 까지 질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학생의 군것질이 문제의 본질도 아니었던 것이다.
떡볶이처럼 새빨갛게 양념한 매운 음식은 6.25 전쟁 이후에 많아졌다고 한다. 대대로 사대문 안에 살았던 우리 집 음식 중에 붉은색이 진한 것은 육개장 정도였다. 김치도 지금처럼 빨갛게 담지 않았고, 비빔밥도 고추장이 아니라 간장에 비벼 먹었다. 그러니까 빨강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경기하던 레드 콤플렉스와 점잔 빼는 전통 가치관이 사람들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 은밀히 손을 잡고 이 열정적인 붉은색의 음식을 혐오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혐오의 정체는 결국 여학생이 시뻘건 떡볶이를 먹는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자라는 내내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여자가~”, “계집애가~”를 앞에 붙여 보면 어른들의 떡볶이 혐오가 제대로 완성된다.
동글동글 얌전하게 잘라 놓은 가래떡이 아니라 길쭉길쭉한 떡에
상스럽고 선정적이기까지 한 시뻘건 양념을 뒤발해서
부글부글 끓여 먹는 이 천박한 음식을,
한없이 순결하고 조신해야 할 여학생들이
공공장소에 앉아 쩝쩝대며 먹는다.
이것이 그 시절 선생님들을 기함하게 한 조목들이다.
그러고 보니 떡볶이의 지위 상승은 그저 세월의 흐름을 따라온 것이 아니라 정확히 우리 사회 여성의 지위에 비례해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꿋꿋하게 흰 카라에 붉은 국물을 묻혀 가며 떡볶이를 먹었고, 지긋지긋한 '여자가~', '계집애가~'의 스트레스를 수다로 풀어냈으며, 그러고 나면 '여자도~'를 독하게 열정적으로 밀고 나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