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의 불안한 눈빛
어떤 눈빛은 잠시 마주쳤을 뿐인데 평생을 쫓아다니기도 한다.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도 그 눈빛만은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어느 소년의 불안하고 복잡했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10살, 혹은 11살 무렵의 초겨울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피아노 학원에 갔고, 원장 선생님은 풀빵을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어른들은 입을 모아 길거리 불량식품 사 먹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대던 시절이었지만 의외의 어른도 있게 마련이다. 마지못해 돈을 받아 들고 학원 바로 앞의 노점에 갔다.
풀빵이 익기를 기다리는 중에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엉성하게 둘러놓은 비닐 천막 밖에 한 아이가 서 있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이 추워 보이는 깡마르고 키가 작은 우리 반 사내아이였다. 급우이긴 한데 이름도 몰랐다. 한 반이 7, 80명씩 되니 일 년 내내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면서도 말 한 번 나눠 보지 못 한 아이들이 적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이는 군것질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왔던 모양이었다. 천막 안을 훔쳐보다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물러났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단내가 풀풀 풍기는 풀빵 봉지를 들고 나올 때까지 그 아이는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소리쳤다. 떨리는 음성이었다.
“너 이를 거야.”
길거리에서 불량식품 사 먹었다고 담임 선생님께 고자질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아이들은 길거리 불량식품을 사 먹지 않을 의무를 졌을 뿐 아니라 이를 어기는 친구를 선생님께 고해바쳐야 하는 신고의 의무까지 지고 있었다.
아이의 눈빛은 목소리보다 더 떨고 있었다. 죄를 지은 건 나고 자신은 그걸 적발한 것뿐인데 왜 그리 떨고 있었을까?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그 어린 눈에 어렸던 복잡함은 또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회의했을까?
같은 어린애의 눈에도 빤히 보이던 그 불안과 갈등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피아노 학원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그 아이가 선생님한테 이르면 어쩌나 별로 걱정도 되지 않았다.
나는 영악하게도 그 아이가 선생님뿐 아니라 친구들에게 조차 발설하지 못할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신 아이의 그 눈빛이 평생 나를 쫓아다녔다.
내가 자식을 낳아 키우고 그 아이들이 다시 아이를 낳을 나이가 되어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시절의 아이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대부분 학대당했던 것 같다. 물론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과거의 아이들은 모두 말도 안 되는 대우를 받으며 자랐다. 특히 1930년대에 태어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처참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내야 했던 우리 부모 세대의 곤궁은 오늘날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부모 세대와의 생활 수준 격차가 가장 심했던 세대일 것이다. 하루 한 끼 꽁보리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며 자란 부모 밑에서 자식들은 대부분 하루 세끼를 먹고 텔레비전을 보며 자라고 있었다. 그 시절 어른들의 눈에 그 시절 아이들은 과분한 호사를 누리며 자라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아이들을 윽박질렀다. 다리 펴고 누울 방 한 칸이라도 있고, 굶기지 않고, 거기다 학교까지 보내주는 부모의 하늘 같은 은혜에 감사하며 복종하라고. 게다가 가까운 다리 밑에는 부모를 잘못 만난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증거 해 줄 거지 떼가 대기하고 있었다. 부모의 공치사는 협박이 되고 아이들은 실체적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학교도, 정부도 아이들에게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군국주의 잔재가 여전한 학교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한 시간도 넘는 운동장 조회를 했고, 체벌과 재식 훈련도 당연한 것이었다.
부유한 같은 반 아이의 과외 선생을 겸하는 담임 선생님은 육성회비를 내지 못한 아이들을 두들겨 패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부모와 교사의 언어폭력은 일상적이었고, 모욕과 혐오의 말들도 훈육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1970년 6월 8일 자 일간지에는 수송 국민학교 어린이들이 불량식품을 사 먹지 말자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피켓을 든 채 구호를 외치며 교정을 돌았다는 보도 기사가 실렸다. 이 날 불량식품으로 꼽은 것들은 구멍가게나 노점에서 파는 번데기, 비닐 주스, 아이스케이크, 냉차, 익히지 않은 과일, 떡볶이, 해삼, 멍게 등이었다.
이후로 70년대 내내 불량식품, 학교 앞 불량식품에 대한 기사는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불량식품에 의한 사고도 많았고 적발된 내용을 보면 공업용 색소, 공업용 방부제, 대장균 덩어리 얼음 등 경악할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이런 궐기대회를 강요한 것은 부당했다. 아이들에게 친구를 감시하라고 강요한 것은 잔인했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며 6월의 땡볕 아래 운동장을 열 맞춰 행진하는 아이들의 무거운 발걸음과 지친 목소리가 눈앞에 보이고 들리는 것만 같았다. 입으로는 사 먹지 않겠다고 외치지만 온몸으로 간절히 원했을 시원한 냉차, 아이스케이크, 비닐 주스 … 그리고 떡볶이.
60년대 초까지 직장 생활을 했던 내 어머니는 서울 시내에서 떡볶이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아마도 50년대와 60년대 초까지는 몇몇 지역에만 떡볶이 노점상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뒤 엄청난 속도로 번져서 70년대에 들어서면 이미 동네마다, 골목골목마다 파고들어 있었다.
내가 살던 서울의 변두리 동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장통 좌판에도 떡볶이가 있었고 학교 앞 문방구나 간판도 없는 점방 여러 곳에서도 떡볶이를 팔았다. 제대로 허가받은 음식점의 상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떡볶이는 늘 학교 앞 불량식품 목록에 이름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조자 없었을 것이다.
우리 동네는 빈부 격차가 유난히 심해서 같은 반에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는 아이부터 수영장 딸린 집에 사는 아이까지 모여 있었다. 6학년 때 반에서 제일 부잣집 친구가 생일 파티를 열었고 예닐곱 명의 여자 아이들이 몰려가 놀다 왔다. 음식은 풍족했을 뿐 아니라 호사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골목 어귀 노점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먹었다. 배웅 나온 집주인까지 모두 다 같이. 그때 떡볶이 값이 얼마였더라….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물가는 어린이 시내버스비 20원이다. 떡볶이 값은 기억이 안 나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5원부터 기억하는 친구가 있었다. 5원, 10원, 20원. 그건 맛있는 간식의 값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 버린 그 시절 아이들의 억압과 불안을 다독이는 짜릿한 일탈과 해방감의 값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아이들은 어땠을까, 요즘 아이들은 어떨까? 그들에게도 불안이 있겠지만 아마도 떡볶이 정도로 짜릿한 일탈과 해방감을 느끼지는 못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