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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십이월 Oct 06. 2022

떡볶이 잔혹사 1

그 아이의 불안한 눈빛


떡볶이 잔혹사 1

그 아이의 불안한 눈빛




어떤 눈빛은 잠시 마주쳤을 뿐인데 평생을 쫓아다니기도 한다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도  눈빛만은 잊을  없는 것이다나는 어느 소년의 불안하고 복잡했던 눈빛을 잊을  없다.

 

10혹은 11 무렵의 초겨울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피아노 학원에 갔고원장 선생님은  풀빵을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어른들은 입을 모아 길거리 불량식품  먹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대던 시절이었지만 의외의 어른도 있게 마련이다마지못해 돈을 받아 들고 학원 바로 앞의 노점에 갔다.

풀빵이 익기를 기다리는 중에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엉성하게 둘러놓은 비닐 천막 밖에  아이가  있었다계절에 맞지 않는 옷이 추워 보이는 깡마르고 키가 작은 우리  사내아이였다급우이긴 한데 이름도 몰랐다 반이 7, 80명씩 되니   내내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면서도    나눠 보지   아이들이 적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이는 군것질을 하러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왔던 모양이었다천막 안을 훔쳐보다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물러났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단내가 풀풀 풍기는 풀빵 봉지를 들고 나올 때까지  아이는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소리쳤다떨리는 음성이었다.

 이를 거야.”

길거리에서 불량식품  먹었다고 담임 선생님께 고자질하겠다는 것이었다.  시절에는 그랬다아이들은 길거리 불량식품을  먹지 않을 의무를 졌을  아니라 이를 어기는 친구를 선생님께 고해바쳐야 하는 신고의 의무까지 지고 있었다.

아이의 눈빛은 목소리보다  떨고 있었다죄를 지은  나고 자신은 그걸 적발한 것뿐인데  그리 떨고 있었을까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어린 눈에 어렸던 복잡함은  무엇이었을까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회의했을까?

같은 어린애의 눈에도 빤히 보이던  불안과 갈등 때문이었을 것이다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서둘러 피아노 학원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아이가 선생님한테 이르면 어쩌나 별로 걱정도 되지 않았다

나는 영악하게도  아이가 선생님뿐 아니라 친구들에게 조차 발설하지 못할 거라는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대신 아이의  눈빛이 평생 나를 쫓아다녔다.  

 

내가 자식을 낳아 키우고  아이들이 다시 아이를 낳을 나이가 되어 돌이켜 생각해 보니  시절의 아이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대부분 학대당했던  같다물론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과거의 아이들은 모두 말도  되는 대우를 받으며 자랐다특히 1930년대에 태어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처참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내야 했던 우리 부모 세대의  곤궁은 오늘날과 비교조차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부모 세대와의 생활 수준 격차가 가장 심했던 세대일 것이다하루   꽁보리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며 자란 부모 밑에서 자식들은 대부분 하루 세끼를 먹고 텔레비전을 보며 자라고 있었다 시절  어른들의 눈에  시절 아이들은 과분한 호사를 누리며 자라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들을 윽박질렀다다리 펴고 누울   칸이라도 있고굶기지 않고거기다 학교까지 보내주는 부모의 하늘 같은 은혜에 감사하며 복종하라고게다가 가까운 다리 밑에는 부모를 잘못 만난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증거 해  거지 떼가 대기하고 있었다부모의 공치사는 협박이 되고 아이들은 실체적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학교도정부도 아이들에게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군국주의 잔재가 여전한 학교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시간도 넘는  운동장 조회를 체벌과 재식 훈련도 당연한 것이었다.

부유한 같은  아이의 과외 선생을 겸하는 담임 선생님은 육성회비를 내지 못한 아이들을 두들겨 패서 집으로 돌려보냈다부모와 교사의 언어폭력은 일상적이었고모욕과 혐오의 말들도 훈육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1970 6 8  일간지에는 수송 국민학교 어린이들이 불량식품을  먹지 말자는 결의문을 낭독하고피켓을   구호를 외치며 교정을 돌았다는 보도 기사가 실렸다  불량식품으로 꼽은 것들은 구멍가게나 노점에서 파는 번데기비닐 주스아이스케이크냉차익히지 않은 과일떡볶이해삼멍게 등이었다.

이후로  70년대 내내 불량식품학교  불량식품에 대한 기사는 끊이지 않았다실제로 불량식품에 의한 사고도 많았고 적발된 내용을 보면 공업용 색소공업용 방부제대장균 덩어리 얼음  경악할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이런 궐기대회를 강요한 것은 부당했다아이들에게 친구를 감시하라고 강요한 것은 잔인했다.

나는  기사를 읽으며 6월의 땡볕 아래 운동장을  맞춰 행진하는 아이들의 무거운 발걸음과 지친 목소리가 눈앞에 보이고 들리는 것만 같았다입으로는  먹지 않겠다고 외치지만 온몸으로 간절히 원했을 시원한 냉차아이스케이크비닐 주스 … 그리고 떡볶이.

 

 

60년대 초까지 직장 생활을 했던  어머니는 서울 시내에서 떡볶이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아마도 50년대와 60년대 초까지는 몇몇 지역에만 떡볶이 노점상이 있었던  같다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번져서 70년대에 들어서면 이미 동네마다골목골목마다 파고들어 있었다.

내가 살던 서울의 변두리 동네 역시 마찬가지였다시장통 좌판에도 떡볶이가 있었고 학교  문방구나 간판도 없는 점방 여러 곳에서도 떡볶이를 팔았다제대로 허가받은 음식점의 상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떡볶이는  학교  불량식품 목록에 이름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조자 없었을 것이다.

 

우리 동네는 빈부 격차가 유난히 심해서 같은 반에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는 아이부터 수영장 딸린 집에 사는 아이까지 모여 있었다.  6학년  반에서 제일 부잣집 친구가 생일 파티를 열었고 예닐곱 명의 여자 아이들이 몰려가 놀다 왔다.  음식은 풍족했을  아니라 호사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골목 어귀 노점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먹었다배웅 나온 집주인까지 모두  같이그때 떡볶이 값이 얼마였더라….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물가는 어린이 시내버스비 20원이다떡볶이 값은 기억이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5원부터 기억하는 친구가 있었다5, 10, 20그건 맛있는 간식의 값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 버린  시절 아이들의 억압과 불안을 다독이는 짜릿한 일탈과 해방감의 값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어땠을까요즘 아이들은 어떨까그들에게도 불안이 있겠지만 아마도 떡볶이 정도로 짜릿한 일탈과 해방감을 느끼지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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