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떡볶이 장수
글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개인적인 사정을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이력에 대해 아무것도 밝히지 않고서 글을 써가다 보면 여기저기서 덜컹덜컹 걸릴 것 같다. 그렇다고 시시콜콜 개인사를 털어놓을 생각도 없다.
그래서 여기까지만 밝히기로 했다. 나는 떡볶이 장수였다. 1997년, 외환위기로 나라가 휘청거리던 그 혼란의 와중에 남편과 나는 수도권 어느 도시의 대형 마트 안에서 분식 장사를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다른 도시의 백화점 식품관 한 귀퉁이에 떡볶이 등을 파는 작은 코너를 하나 더 운영하기 시작했다.
떡볶이 코너를 운영했다고 하니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실은 새로 문을 여는 백화점 지하 식품관의 구획이 끝나고 난 뒤 남은 직원 통로 옆 자투리 자리를 얻은 것이었다. 거기서 별 기술도 필요 없고 설비도 필요 없고 당시에는 아무도 탐내지 않던 품목인 떡볶이와 튀김 등을 만들어 팔았다.
장사를 하게 된 과정과 초기의 우여곡절에 대해 여기서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뒤 장사는 사업이 되었고 사업은 규모를 키워 10여 년쯤 뒤부터는 자수성가했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떡볶이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백화점 직원의 소개로 다른 점 떡볶이 코너 사장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사장님의 소스 맛이 좋으니 가서 배워 오라는 귀띔을 해준 것이다.
사장님은 우리보다 반 세대쯤 위, 50 전후로 보이는 여자분이었는데 비결은 가르쳐 주지 않고 동정 반, 혐오 반의 묘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다.
“떡볶이 장사는 ‘막장’이라는데 젊은 사람들이 왜 이런 걸 하려고 들어요?”
당시만 해도 젊은 사람들이 음식 장사에 나서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도 사실이고, 장사에 대한 터부가 남아 있기도 했다. 하지만 백화점에서 장사하는 그 사장님의 ‘막장’이라는 말에는 과도한 자의식과 자기 연민이 깔려 있었고, 나 또한 막장까지 몰려서 떡볶이 장사를 했던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장’이라는 말은 이후 사업이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모멸과 무시를 당한다고 느낄 때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씁쓸한 단어였다.
1969년 9월 17일 매일경제 신문에는 은행에 근무하는 신혜경이라는 분이 투고한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이 내가 찾아본 것 중 가장 오래된 떡볶이 관련 신문 글이다.
물론 떡볶이라는 단어를 넣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검색하면 그 이전부터 몇몇 기사들이 검색되지만 그 떡볶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떡볶이가 아니라 떡찜(궁중 떡볶이)이다. 길게 썬 가래떡에 고기와 버섯, 채소 등을 넣고 간장으로 양념하는 설 명절 별식 말이다.
1969년! 마복림 할머니가 신당동 떡볶이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는 1953년으로부터 무려 16년 만에 처음으로 신문에서 떡볶이가 언급된 것이다.
글의 내용은, 학교 때 추운 겨울날 하나만 먹어도 추위가 사라지고 콧잔등에 땀이 나던 단골 떡볶이 포장집의 맵고 뜨거운 떡볶이에 대한 추억이었다. 맛도 맛이지만 독특한 사투리로 농담도 던지고 며칠 방문하지 않으면 친구들을 통해 안부도 묻는 주인아저씨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또, 무엇보다 남학생이 같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고 계산도 각자 해서 편하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세월이 지나 본인은 생활에 젖은 직장인이 되었고 그 떡볶이 포장집의 주인아저씨는 생활고로 자살을 해 학창 시절 단골집은 더욱 잊지 못한다는 말로 글을 맺었다.
필자는 떡볶이 포장집 주인아저씨가 독특한 사투리를 썼다고 했는데 인용된 대화에서 ‘~ 고만 오라우’. ‘~어떡하갔어’ 등의 어미로 봤을 때는 월남민이 분명하다. 생활고로 자살했다는 개인사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충분히 짐작이 간다.
떡볶이는 지금도 간혹 노점에서 팔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노점에서 파는 음식이었다. 건물 안에서 판다고 해도 제대로 신고를 한 음식점이 아니라 학교 앞 문방구 구석에서 끓여 파는 무허가 음식이었다.
가게 임대료 없이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싶어도 자본은 필요하다. 옷을 팔겠고 하면 옷을 도매로 떼어올 돈이 있어야 하고, 과일 장사를 하겠다고 해도 과일을 사 올 돈이 있어야 하니까. 이에 비해 떡볶이 장사는 떡과 집에 있는 양념, 조리도구 등만 갖고 나오면 되니까 투자비가 아주 적었다.
이렇게 진입장벽이 낮은 덕분에 떡볶이 장사는 삶의 막장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생계 방편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막장’이라는 꼬리표는 50여 년 세월에도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막다른 생계의 방편으로 거리에 나와 솥을 걸고 떡볶이를 만들어 팔았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마저 여의치 않아 절망해야 했을까? 길고 깊은 갱도의 끄트머리, 운신할 수 없는 좁은 공간, 석탄 속 같은 어둠, 희박한 산소, 살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뚫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굴진(掘進)의 막장. 처절한 절망이 응축된 한 마디가 바로 ‘막장’이다.
커다란 철판 위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시뻘건 떡볶이를 보며 나는 요즘도 가끔 ‘막장’을 떠올린다. 떡볶이는 궁핍한 시절 삶의 ‘막장’에서 끓여 낸 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