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음식이 위험해졌다
나의 당대는 일제 강점기가 끝나가던 무렵부터 어렴풋이 시작되어 6.25 전쟁부터 선명해진다. 내 부모가 또렷이 기억하고 되풀이해 이야기해 주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할머니가 시집오던 해 순종 황제의 인산을 보러 나가셨던 날까지 갈 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흐릿한 기억일 뿐이다
1935년생 내 어머니는 전쟁이 끝난 뒤 학원에서 타이핑을 배웠고 열아홉 살부터 종로의 한 관공서에 근무했다. 입고 출근할 옷도 신발도 없어 구제품을 사 입었고, 종로까지 전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점심으로 밥을 사 먹을 돈이 모자라 국수를 먹었고, 오후 3시만 되면 늘 허기가 졌다고도 한다. 가난한 시절,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집 소녀들 중에 그래도 썩 운이 좋은 편이었다.
6.25 전쟁 이후 서울 등 대도시로 몰려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길거리에서 싼 값에 간단히 배를 채울 만한 간식이나 식사 대용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떡볶이는 이런 필요에 의해 개발된 음식이다.
예전에는 떡볶이의 계보를 궁중요리인 떡찜에서 찾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떡찜(혹은 궁중 떡볶이)은 가래떡으로 조리했다는 것 이외에 지금의 떡볶이와 아무 연관성 없다는 걸 대부분 인정한다.
그 후 신당동 떡볶이가 유명해지면서 마복림 할머니의 이야기가 떡볶이의 유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었다. 개업 떡이 우연히 짜장면 그릇에 툭 떨어지는 순간 떡볶이의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것이 떡볶이의 시작이었다고. 우리 시대의 전설이다.
나는 마복림 여사가 청계천에 솥을 걸고 볶아 팔았다는 떡볶이의 떡이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하다. 그분이 고추장 광고 모델을 하신 탓인지 떡볶이 양념에 대해서는 꽤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는 데 비해 떡에 대해서는 정보를 찾을 수 없다. 그건 쌀떡이었을까, 밀떡이었을까? 그건 지금의 신당동 떡볶이 같은 가느다란 굵기였을까, 굵은 떡국 떡을 적당히 썰어 썼을까?
최초의 떡볶이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 떡볶이라는 음식이 형성되고 확산되고 뿌리내리는 과정에서의 떡볶이 떡은 분명 밀떡이었을 것이다. 전쟁 직후는 물론이고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쌀이 부족했고, 정부가 절미를 강제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까지 밀가루는 귀한 식재료였고 밀가루가 쌀보다 흔해진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였다. 밀가루 음식을 해먹을 기술도 설비도 없던 이들에게 질 낮은 밀가루는 쌀을 대신하기에는 형편없는 구황식품에 가까웠다.
1964년 4월 29일 자 경향신문에는 왜관에서 아이들이 주워 온 대전차 지뢰가 폭발해 여럿이 죽고 다쳤다는 기사가 실렸다. 가난으로 학교도 다닐 수 없던 아이들은 이 날 아침 배가 고파 못 견디겠으니 쑥을 뜯어 다 배급받은 밀가루로 떡을 해 먹겠다며 나갔다고 한다. 산산조각 난 아이들의 시신을 덮을 옷가지조차 없는 지독한 가난이 신문 한구석에서 오열하고 있었다.
가난한 아이들이 마지못해 욕망했던 밀가루 떡.
밀가루 떡은 궁핍한 시대의 상징이었다.
떡볶이의 뿌리는 바로 이 밀가루 떡에 있다.
쌀로 뽑은 가래떡은 기름간장만 찍어 먹어도 맛있고, 조청이라도 찍어 먹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이에 비해 밀가루 떡은 쌀떡의 고소한 맛이 없기 때문에 양념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미 밀가루로 만든 값싼 양조 고추장도 시장에 나와 있었으니 때깔 좋고 자극적인 고추장 떡볶이가 밀가루 떡의 밍밍한 맛을 감춰줄 만하지 않았을까?
밀가루떡과 밀가루 고추장, 여기까지가 보통 얘기되는 떡볶이 탄생의 배경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태고 싶은 것이 있다. 달달한 맛! 고추장의 매운맛 못지않게 중요한 단맛 말이다. 떡볶이의 단맛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그것은 밀가루와 함께 미국에서 대량 생산된 옥수수에서 왔을 것이다. 옥수수로 만든 값싼 전분당인 물엿이 공급되면서 떡볶이는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결국 미국의 잉여 농산물들이 한반도 남쪽에 쏟아져 들어와 떡볶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유명 세프는 떡볶이는 미국이 만들어낸 음식이라고 했다.
미국이 만들었든 전쟁이 만들었든 가난이 만들었든 가난한 누군가가 만들었든 밀가루 떡볶이는 참혹한 음식이다. 제국주의 수탈에서 벗어나자마자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가 민중의 주린 위장과 입맛을 볼모로 잡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음식인 것이다.
또한 떡볶이는 처음부터 상품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우리 음식이다. 50년대 청계천변에 그렇게 많았다는 빈대떡집의 녹두전은 오랜 세월 가정에서 먹던 음식을 거리에서 만들어 팔았을 뿐이다. 설렁탕, 비빔밥, 냉면도 모두 마찬가지다. 호떡이나 풀빵은 외국에서 들어온 음식이다.
이에 비해 떡볶이는 처음부터 상품이었고, 오히려 한참 뒤에야 가정에서도 만들어 먹는 우리 음식이 되었다. 상품으로 기획된 만큼 강퍅했던 시대에 맞춰 맛도 모양도 자극적이었다.
가난한 음식은 맛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가난한 음식을 맛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고된 노동과 시간의 힘이 필요하다. 지금은 건강식이라고 하는 무청 시래기나 우거지를 생각해 보자. 비가식 부위에 가까운 억센 이파리를 다듬고, 씻고, 삶고, 말리고, 얼리고... 불리고, 다시 씻고, 삶고, 뜸 들이고, 우려내고, 또 다듬는 노고와 한 해 가을, 겨울의 시간을 들여야 비로소 국도 끓이고, 나물도 볶고, 지짐도 해먹을 식재료가 되는 것이다. 그래도 맛있다는 사람보다 맛없다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가난한 음식이다.
그런데 먼 나라에서 건너온 떡볶이의 가난한 재료들은 과학기술과 자본의 힘으로 마법처럼 뚝딱 맛있는 음식으로 변신해 우리를 유혹했다. 이제 가난한 음식은 위험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