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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십이월 Oct 28. 2022

쌀떡의 귀환

떡볶이의 정치경제학


쌀떡의 귀환

떡볶이의 정치경제학




요즘 아이들도 ‘보리’ 놀이를 할까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있더라도  보리는 소용없고 쌀을 재빨리 잡아야 이기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놀이에서 조차 쌀은 소중하다.

  이팝나무를   있나작고  꽃이 다닥다닥 피어나는 것을 보고 다른 민족은  눈을 떠올렸지만 우리 선조들은 이밥을 생각했다 지어 주발에 소복하게  담은 고슬고슬한 쌀밥 말이다.

드라마 파친코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뱃속에 아이를 품은  현해탄을 건너가는 딸을 위해 어렵게 쌀을 구해 밥을  먹인다쌀밥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  사발을 먹고 떠난 딸은  훗날 노인이 되어서도 조선 쌀의 맛을 구별해 기억한다.

 

끄집어내려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이  이야기이다.  우리 민족 반만년의 역사가 쌀과 함께 했고쌀은 우리의 목숨이고   자체였으니까 이야기가 모두 애틋하고 소박하고 정감 있는 것만은 아니다우리와 이렇게 밀접하고 우리에게 이렇게 중요했기 때문에 쌀은 지극히 정치경제적이다.

전근대의 긴긴 세월 동안 쌀은  경제였다조선시대에는 물론이고 1950년대까지도 월급을 쌀로 지급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머니는 6.25 전쟁 직후에 월급 대신 받은 쌀을 집까지 들고   없어 쩔쩔맸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또한 쌀은 너무나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벼농사를 짓는 농부도 장수도 임의로 처분할  없는 경우가 많았다쌀을 통제하는 것이  권력이었다. 80년대 이전 세대는 누구나 절미의 시대를 경과했다돈이 있어도 함부로  먹을  없는 것이 쌀과  가공품들이었다.

 

정부의 절미 정책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특히 영조는 긴긴 치세 기간의 대부분에 금주령을 내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술을 금했을까바로 곡식그것도 주로  때문이었다부자들이 쌀로 술까지 마음껏 빚어 먹도록 방치하면 가난한 백성들이 먹을 쌀은 그만큼 줄어드니까.

일제 강점기에 절미 정책은 그악스러워졌다조선 땅의 쌀을 모조리 자기네 나라와 자기네 나라 군인들의 전장으로 실어 나른 일제는 가증스럽게도  땅의 주인들에게는 절미의 방책을 교육했다.

해방 후에도 6.25 전쟁 중에도 전쟁 후에도 60년대에도 70년대에도 여전히 쌀은 부족했고 정부의 절미 정책은 계속됐다그중에서 우리 세대가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혼분식 장려 정책이다도시락에 잡곡이 얼마나 섞였는지 검사받던 기억은 이제 추억으로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쌀의 가치와  음식 문화를 폄하하는  정책의 후유증은 의외로 크다.

일반 가정에서는  정도였지만 음식점은  강력한 혼분식 장려 정책을 적용받았다밥에는 잡곡을 일정  이상 섞어야 하고탕에도 면을 넣어야 하고, 1인분 밥의 양까지 통제하는가 하면 잔반을 없애기 위해 밥솥을 내놓고 먹을 만큼 밥을 퍼주라고 강요하기도 했다심지어 아예 밥을 판매할  없는 무미일( 없는 )까지 지정되었다그저 권장하고 유도했다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정해서 단속하고 처벌했다.

 

'서울시는 1971 12월부터 72 1 6일까지 음식점의 혼분식 위반을 단속해 업체 228개를 적발  무허가 식당 90개는 폐쇄시키고나머지는 3개월씩 영업정지 처분을 했다.(1972 1 8  조선일보 기사)'

 

이런 종류의 기사가 끊이지 않았다영업정지 3개월은 영세 상인들이 사실상 폐업으로 내몰리는 수준의 무거운 처벌이다.  

 

1975  자급이 이루어지며 절미 정책들은 차츰 사라졌다 자급의 일등 공신은 수확량이 많은 벼의 육종이었다통일벼로 불리던  품종은 쌀의 자급을 앞당겼는지는 몰라도 맛은 형편없었다보리밥만도  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가정에서 밥은 일반미로  먹지만  명절의 가래떡은 정부가 비축하고 있던 쌀인 정부미로 뽑아 먹는 경우가 많았다정부미 가래떡은 색깔도 누렇고 맛도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떡으로 집집마다 겨울 방학 내내 떡볶이를  먹었다당시 집에서  먹던 떡볶이는 대부분 소고기도 고급 버섯도 들어가지 않은 그냥 간장 떡볶이였다.    

실제로 먹을 만한 쌀이 풍족해진 것은 80년대 중반 이후이며그러자 이번에는  시장 개방 압력이 시작됐다. 1995결국  수입은 현실화되었다당시에는 의무 수입량을 받는 것으로 시작했고수입 쌀은 가공공장에서 소비했다막걸리,  떡볶이   수입 쌀의 수요처가 있었기 때문에  가정의 밥솥은 안전할  있었다.

 

내가 떡볶이 장사를 시작한 것이 바로  즈음이었다당시 우리가 판매한 떡볶이의 정확한 상품명은 '쌀떡볶이었다젊은 사람들은  반응이 없었지만 나이가 있는 고객들은 자주 확인을 하려 들었다.

정말 쌀떡이라고?”

밀이  톨도 섞이지 않은 진짜 쌀떡으로 떡볶이를 만들어 판다는 것이 절미의 시대를 살아온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선뜻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쌀이 수입되기 이전까지 떡볶이는 당연히 밀떡볶이었다. 70년대까지는 쌀떡 판매가 불가능했고규제가 사라진 뒤에도 쌀은 너무 비쌌다쌀떡볶이가 있기는 했지만 드물었고 말만  떡볶이지   보다 밀가루가  많이 들어간 경우도 많았다원재료 표시를 믿을  없는 경우도 많던 시절이었다.

혹시 나도 속아서 밀가루 섞인 떡을 사다가  떡볶이라며   아닐까글쎄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밀가루를 섞어 양을 늘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수입된 쌀은 값이 쌌고가공용으로 공급된 쌀이 다른 곳으로 흘러 나가는 것을 정부가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쌀떡은 귀환했고이후 한동안 떡볶이는  떡볶이가 대세였다떡볶이는 처음부터 밀떡으로 만들어 팔던 것인데 쌀떡의 귀환은 무슨 귀환이냐고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떡볶이라는 이름에 이미 쌀떡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떡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쌀떡의 자리가 비워져 있었고쌀떡볶이는 정확히  자리로 귀환한 것이다.   

99% 쌀로 만든 흰떡 떡으로 만든 새빨간 떡볶이는 한반도  문화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미끈거리지 않고 식어도 바로 딱딱해지지 않고 쫀득하니 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나고 든든하면서 소화도  되는 쌀떡이화끈하게 맵고 달달하니 입에 착착 감기는 양념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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