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의 정치경제학
요즘 아이들도 ‘쌀, 보리’ 놀이를 할까?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있더라도 왜 보리는 소용없고 쌀을 재빨리 잡아야 이기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쌀! 놀이에서 조차 쌀은 소중하다.
꽃 핀 이팝나무를 본 적 있나? 작고 흰 꽃이 다닥다닥 피어나는 것을 보고 다른 민족은 흰 눈을 떠올렸지만 우리 선조들은 이밥을 생각했다. 밥! 갓 지어 주발에 소복하게 퍼 담은 고슬고슬한 쌀밥 말이다.
드라마 파친코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뱃속에 아이를 품은 채 현해탄을 건너가는 딸을 위해 어렵게 쌀을 구해 밥을 해 먹인다. 쌀밥!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 한 사발을 먹고 떠난 딸은 먼 훗날 노인이 되어서도 조선 쌀의 맛을 구별해 기억한다.
끄집어내려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이 쌀 이야기이다. 우리 민족 반만년의 역사가 쌀과 함께 했고, 쌀은 우리의 목숨이고 삶 그 자체였으니까. 쌀 이야기가 모두 애틋하고 소박하고 정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와 이렇게 밀접하고 우리에게 이렇게 중요했기 때문에 쌀은 지극히 정치경제적이다.
전근대의 긴긴 세월 동안 쌀은 곧 경제였다. 조선시대에는 물론이고 1950년대까지도 월급을 쌀로 지급하는 경우가 있었다. 내 어머니는 6.25 전쟁 직후에 월급 대신 받은 쌀을 집까지 들고 갈 수 없어 쩔쩔맸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또한 쌀은 너무나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벼농사를 짓는 농부도, 쌀 장수도 임의로 처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쌀을 통제하는 것이 곧 권력이었다. 80년대 이전 세대는 누구나 절미의 시대를 경과했다. 돈이 있어도 함부로 사 먹을 수 없는 것이 쌀과 쌀 가공품들이었다.
정부의 절미 정책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영조는 긴긴 치세 기간의 대부분에 금주령을 내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왜 술을 금했을까? 바로 곡식, 그것도 주로 쌀 때문이었다. 부자들이 쌀로 술까지 마음껏 빚어 먹도록 방치하면 가난한 백성들이 먹을 쌀은 그만큼 줄어드니까.
일제 강점기에 절미 정책은 그악스러워졌다. 조선 땅의 쌀을 모조리 자기네 나라와 자기네 나라 군인들의 전장으로 실어 나른 일제는 가증스럽게도 이 땅의 주인들에게는 절미의 방책을 교육했다.
해방 후에도 6.25 전쟁 중에도 전쟁 후에도 60년대에도 70년대에도 여전히 쌀은 부족했고 정부의 절미 정책은 계속됐다. 그중에서 우리 세대가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혼분식 장려 정책이다. 도시락에 잡곡이 얼마나 섞였는지 검사받던 기억은 이제 추억으로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쌀의 가치와 쌀 음식 문화를 폄하하는 이 정책의 후유증은 의외로 크다.
일반 가정에서는 이 정도였지만 음식점은 더 강력한 혼분식 장려 정책을 적용받았다. 밥에는 잡곡을 일정 양 이상 섞어야 하고, 탕에도 면을 넣어야 하고, 1인분 밥의 양까지 통제하는가 하면 잔반을 없애기 위해 밥솥을 내놓고 먹을 만큼 밥을 퍼주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심지어 아예 밥을 판매할 수 없는 무미일(쌀 없는 날)까지 지정되었다. 그저 권장하고 유도했다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정해서 단속하고 처벌했다.
'서울시는 1971년 12월부터 72년 1월 6일까지 음식점의 혼분식 위반을 단속해 업체 228개를 적발, 이 중 무허가 식당 90개는 폐쇄시키고, 나머지는 3개월씩 영업정지 처분을 했다.(1972년 1월 8일 자 조선일보 기사)'
이런 종류의 기사가 끊이지 않았다. 영업정지 3개월은 영세 상인들이 사실상 폐업으로 내몰리는 수준의 무거운 처벌이다.
1975년 쌀 자급이 이루어지며 절미 정책들은 차츰 사라졌다. 쌀 자급의 일등 공신은 수확량이 많은 벼의 육종이었다. 통일벼로 불리던 새 품종은 쌀의 자급을 앞당겼는지는 몰라도 맛은 형편없었다. 보리밥만도 못 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가정에서 밥은 일반미로 해 먹지만 설 명절의 가래떡은 정부가 비축하고 있던 쌀인 정부미로 뽑아 먹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미 가래떡은 색깔도 누렇고 맛도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그 떡으로 집집마다 겨울 방학 내내 떡볶이를 해 먹었다. 당시 집에서 해 먹던 떡볶이는 대부분 소고기도 고급 버섯도 들어가지 않은 그냥 간장 떡볶이였다.
실제로 먹을 만한 쌀이 풍족해진 것은 80년대 중반 이후이며, 그러자 이번에는 쌀 시장 개방 압력이 시작됐다. 1995년, 결국 쌀 수입은 현실화되었다. 당시에는 의무 수입량을 받는 것으로 시작했고, 수입 쌀은 가공공장에서 소비했다. 막걸리, 떡볶이 떡 등 수입 쌀의 수요처가 있었기 때문에 각 가정의 밥솥은 안전할 수 있었다.
내가 떡볶이 장사를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즈음이었다. 당시 우리가 판매한 떡볶이의 정확한 상품명은 '쌀떡볶이' 었다. 젊은 사람들은 별 반응이 없었지만 나이가 있는 고객들은 자주 확인을 하려 들었다.
“정말 쌀떡이라고?”
밀이 한 톨도 섞이지 않은 진짜 쌀떡으로 떡볶이를 만들어 판다는 것이 절미의 시대를 살아온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선뜻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쌀이 수입되기 이전까지 떡볶이는 당연히 밀떡볶이었다. 70년대까지는 쌀떡 판매가 불가능했고, 규제가 사라진 뒤에도 쌀은 너무 비쌌다. 쌀떡볶이가 있기는 했지만 드물었고 말만 쌀 떡볶이지 쌀 보다 밀가루가 더 많이 들어간 경우도 많았다. 원재료 표시를 믿을 수 없는 경우도 많던 시절이었다.
혹시 나도 속아서 밀가루 섞인 떡을 사다가 쌀 떡볶이라며 판 건 아닐까? 글쎄.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밀가루를 섞어 양을 늘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수입된 쌀은 값이 쌌고, 가공용으로 공급된 쌀이 다른 곳으로 흘러 나가는 것을 정부가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쌀떡은 귀환했고, 이후 한동안 떡볶이는 쌀 떡볶이가 대세였다. 떡볶이는 처음부터 밀떡으로 만들어 팔던 것인데 쌀떡의 귀환은 무슨 귀환이냐고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떡볶이라는 이름에 이미 쌀떡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떡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늘 쌀떡의 자리가 비워져 있었고, 쌀떡볶이는 정확히 그 자리로 귀환한 것이다.
99% 쌀로 만든 흰떡, 그 떡으로 만든 새빨간 떡볶이는 한반도 쌀 문화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미끈거리지 않고 식어도 바로 딱딱해지지 않고 쫀득하니 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나고 든든하면서 소화도 잘 되는 쌀떡이, 화끈하게 맵고 달달하니 입에 착착 감기는 양념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