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맡에 두고 주무시던 그림도구들과 책들... 잠에서 깨면 글을 쓰시고 그림을 그리셨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정말 너무나 힘들고 또 힘든 역사의 연속이었다.
물론 이 시대 많은 나라들이 전쟁을 치르고 많은 철학과 이데올로기의 갈등들이 있었지만 대한민국 한일 합방韓日合邦 이후부터 지금 2024년의 정부 계엄령 선포까지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과 시대착오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희망과 불굴의 의지는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격동의 역사이다.
이런 시대에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창조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정치와 이념 이데올로기와 철학까지를 다 떠나서도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영향을 모두 무시하고 살 수 있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가들의 섬세하고 예민한 심장은 이런 모든 것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절대로 정치에 가담하지도 않으셨고 정치적인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적도 없으시지만 평생 시달리신 아버지의 불면증과 악몽의 연속은 아버지가 사회 안에서 겪은 많은 상처와 고통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정말 존경스러운 것은 이렇게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실 때 항상 머리맡에 그림도구를 두고 주무시다가 갑자기 깨면 종이에 이렇게 느낌을 습작하셨다.
악몽에서 깨서 불면증을 가진 사람이 이런 자신의 정신적 상태를 극복해서 예술로 남기려고 했다는 것이 나는 정말 존경스럽다.
역사의 아픔을 극복하는 길은 사람마다 다르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 우울증에 걸려버리는 사람,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 도망가 버리는 사람, 복수를 꿈꾸는 사람...
조영동 화백의 불면증과 악몽들은 수도 없이 종이, 달력의 뒷장, 휴지 조각... 등에 그려진 예술작품으로 우리에게 남았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의 하나라는 스페인의 지중해 내륙 지방에 살고 있다.
어째서 사람들이 이곳이 가장 살기 좋다고 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돈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벌어 호화스럽고 편한 생활을 누릴 수 있어서가 절대로 아니다.
나의 존재를 상관하는 사람도 없고 나를 극대하거나 무시를 하는 사람도 없고 제각기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가면서 즐길 수 있는 민주적 기반과 자유가 형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얼굴에 화장도 안 하고 머리를 그냥 동여매고 편한 옷을 입고 나가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주어진 일을 그날그날 잘 해내면 기본적인 삶이 보장될 수 있는 악몽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곳도 많은 문제들이 존재하지만 나의 평화 그리고 너의 평화를 같이 추구해 나가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은 그렇지 않은 세상보다 악몽이 적게 존재하는 것 같다.
아버지의 불면증에서 나온 이 악몽들의 그림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아버지가 살아오신 힘들었던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아름다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불굴의 정신, 이것을 아름다운 추상으로 남긴 아버지의 예술혼을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 대부분의 이 습작들은 성신여대 박물관에 기증되었습니다. 지금 진행 중인 성신여대 전시장에 가시면 더 많은 이 악몽의 습작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