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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조영동 화백이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삶의 가치

by Siesta


01.jpg?type=w966 조각하는 것을 좋아하셨지만 돈이 없어서 포기하셨다던 나의 아버지 사진제공: 충북 문화원




다시 서울로 온 아버지의 그림들을 보기 위해 나는 다시 18시간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간다.


나에게 아버지의 그림들은 나의 조국이고 나의 뿌리이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창조 에너지이다.


미술계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비 웃을 수도 있다.


"시장 형성이 전혀 안된 무명작가"


라고 말씀하신 한 유명 갤러리 사장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유명 무명이 나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나라를 3번이나 바꾸면서 살아남다 보니 나에게 유명 무명이 얼마나 fragil 한 것인지 깨닫게 해 주었다.


한국에서 유명해도 독일에선 아무도 모르고 독일에서 유명해도 한국은 아무도 모르고 스페인에서 유명해도 독일은 아무도 모르고 독일에서 유명해도 스페인에서는 아무도 모르고...


이런 것이 유명세다.


또 2018년 코로나 전에는 유명했었는데 코로나 끝나고 나니깐 아무도 모르고 코로나 끝나고 유명했었는데 전쟁 나니깐 다 잊어 버리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유명세는 계속 변하기 마련이다.


가격도 마찬가지이다.


올렸다 내렸다...


예술품만이 아니라 모든 가치가 있었다 없었다 하는 것이 인간 사회이다.


하지만 진정한 가치를 마음에 담고 이 세상을 살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예술가들이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진정한 예술가였던 나의 아버지의 그림들을 나 몰라라 하고 내 팽개칠 수가 없다.


자식을 낳은 부모로서 나의 아이들에게도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줘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나의 아버지 조영동 화백의 진정한 철학과 예술 정신이 대한민국에 이해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직도 너무나 많은 가치의 혼돈과 진정한 인간존중의 의미를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 같이 보이는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언젠가는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 철학가의 한 사람으로 아버지의 따듯한 추상화가 남는 날을 기대해 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lsLEpKQkhLc




https://www.youtube.com/watch?v=GQsiht4B3iw





https://www.youtube.com/shorts/hr-utDNg_Aw







https://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846692





https://m.blog.naver.com/parkjs0320/223713417775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332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41129500051









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84414






https://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825408





https://blog.naver.com/keeart






내가 백두산 꼭 올라가 보고 죽는다.

아버지의 통일 염원 (念願)


6YQ58WFtNEKZcWN1_bKfCkUrXK4 사진 제공: 공주 교육 대학교


File0122.jpg?type=w966 아버지가 백두산 천지연에서 80년대 찍은 사진


IMGP1463_copia.jpg?type=w966 1990년 습작 천지연 수채화로 완성하신 그림




아버지가 백두산 천지연을 공주교육 대학의 벽화로 그리신 것은 1970년대 초반이다.


이 그림은 사진을 보고 완성하신 것으로 아버지는 이 그림에 대해 내내 말씀하시며


-꼭 가서 보고 그 감동을 즉시에서 드로잉 해서 그려보고 죽는다-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하신 말씀대로 어떤 경로로 가셨는지 모르지만 80년대 말 아버지는 백두산의 천지연에 올라가셔서 그 감동을 즉시에서 드로잉 해 오셔서 집에 와서 수채화로 완성하셨다.


즉시의 흥분과 감동을 아마 매직으로 빠르게 그리신 것 같다.


아버지는 이렇게 한번 지나가는 말처럼 하신 말씀을 모두 이루셨다.


어떻게 그 당시에 백두산을 올라가셨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평소에 하시던 말씀대로 백두산을 보고 돌아가셨다.


처음에 있는 백두산 유화는 아버지가 백두산 천지연을 못 보셨을 때의 그림이고 두 번째 백두산은 아버지가 백두산을 보시고 난 이후의 그림이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이 이북에서였고 어머니는 이북 땅에 대해 많은 추억과 말 못 할 슬픈 과거를 가지고 계셨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은 어머니의 고향을 가 보고 돌아가실 줄 알았다.


이렇게라도 아버지가 어머니 대신 이북 땅을 밟고 또 아름다운 천지연을 그리신 것에 대해 나는 감사한다.


이제는 너무나 오래 분단이 되어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버린 남한과 북한...


그래서 아버님 어머님의 세대에서는 이 두 나라가 한 나라였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조차 없다.


아버지 어머니가 태어나신 1920년 후반 1930년 전반 우리나라의 모습은 어떻했었을까...


대한민국 땅이 민족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피에 물 둘기 전 이 나라를 사셨던 어르신들이 이젠 거의 모두 하늘나라로 가셨다.


하지만 아버지의 전쟁 이전의 대한민국, 모두가 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 아버지의 백두산 천지연으로 우리에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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