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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진 Jul 31. 2024

11."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ㅡ렘브란트 <삼손의 실명>

그대 목소리에 내 마음이 열려요.

꽃봉오리가 아침의 키스에 열리듯 말이죠.

하지만 사랑하는 당신.

내 흐르는 눈물을 멈춰주려면

다시 한번 그대 음성을 들려주세요.

이 데릴라에게 영원히 돌아온다고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그 옛날의 약속들을..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세요.

환희에 넘치게 해 주세요.

나의 사랑에 답해주셔요.

나를 환희에 넘치게 해 주세요..

사랑한다는 말을 어서 들려주세요   

ㅡ<그대 목소리에 내 마음 열리고>(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


사내들이라면 다 그렇지 않을까요?

눈 돌아갈 정도로 관능적인 여인이 나에게 매달리며 사랑한다고 하는데 안 넘어갈 사내는 남자도 아닐 겁니다.

그녀는 사랑한다면서 몇 번이고 나의 힘의 원천에 대해 달콤하게 물어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를 속여 보았지만 이 깜찍한 여인은 끔찍하게도 단념하지 않더군요. 알려줄 수도 있었지만, 사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한번 저울질해 보고 싶은 속셈도 있었지요. 사랑인지 욕정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요염한 몸짓에 눈이 멀어 그만 내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은 죄가 아닌데, 그녀에게 푹 빠져버린 죄로  앞을 못 보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랑에 속아 인생을 망친 남자의 이야기를 함 들어보시렵니까?


스파이를 사랑한 '힘만 쎈  바보'

예상하셨겠지만 내 이름은 삼손입니다.《성경》 '사사기'에 내 이야기가 쓰여있지요. 나는 이스라엘 민족을 블레셋(지금의 팔레스타인)의 압제 하에서 구원해야 하는(사사기 13:5)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스라엘 땅에 태어났습니다. 신은 내게 엄청난 힘을 주셨답니다. 그 힘의 원천은 바로 머리카락이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서 한 번도 머리카락에 칼을 대지 않았습니다. 내 괴력은 굉장했습니다. 믿으실 수 없겠지만 사자도 때려잡고,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들 1000명 정도를 가볍게 해치울 만큼의 힘이었죠. 하지만 여자에게는 약한 사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힘만 쎈 바보'가 맞는 것 같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데릴라’라는 미녀를  매수해 제 비밀을 알아오게 했죠. 그녀의 미모와 달콤한 목소리 뒤에 그런 음모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녀는 미녀 스파이의 대명사로 통하는,《성경》 속의 '마타 하리'였습니다. 나는 이미 이 '마타 하리'에게 푹 빠져 있었어요.


‘당신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데릴라는 나긋한 목소리로 꾀었지만 나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린 물방울이 단단한 바위를 뚫듯이 그녀의 눈물은 주먹보다 강했습니다. 눈물을 머금은 큰 눈으로 집요하게 묻는데, 당해낼 재간이 없었죠.


난 분명 그녀의 무릎을 베고 곤히 자고 있었습니다.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눈을 떠 보니, 데릴라가 내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기가 막혔습니다. 저항해보려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바닥에는 이미 잘린 머리카락이 가득했죠. 난 힘을 잃었고, 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혔습니다. 눈동자가 뽑히고, 끌려가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고통을 연기하는 발가락

자랑 같지만 내 이야기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식스팩이 돋보이는 근육질 몸매., 영웅을 유혹하는 요염한 여인, 돈, 음모, 배신, 복수, 반전 등 세상 사람들이 좋아할 요소들은 다 갖추었거든요.

음악가나 소설가 들뿐만 아니라 화가들도 제가 배신과 수치를 당한 순간을 캔버스에 남겼습니다. 그중에 네덜란드 사람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1606-1669)의 그림 <삼손의 실명>이 단연 실감 납니다. 그 생생하고 치밀한 묘사에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소름이 돋았습니다. 끔찍하고 잔인했던 순간을 마치 눈앞에서 본 것마냥 잘도 묘사해 놓았더군요.


렘브란트, <삼손의 실명 >, 1636 , 캔버스에 유채, 219.3x305cm



나의 괴력을 두려워했던 블레셋 병사들은 이제는 힘이 사라진  나를 강아지처럼 겁박했습니다. 그들은 사슬로 내 손을 묶고 나를 넘어뜨렸습니다. 큰 창으로 제압하고 잔인하게도  칼로 눈을 파내었습니다. 오른쪽 눈에서 솟아오르는 새빨간 피는 칼로 인한 고통을 생생하게 극화합니다. 그럼에도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화가는 영리하게도 눈이 찔려 몸부림치는 모습을, 아니 나의 아픔을, 그것도 발가락 끝으로 극대화하고 있었습니다. 고통으로 오그라든 발가락의 미묘한 표정 연기가 압권입니다. 이 발가락 끝의 뛰어난 연출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극한 두려움과 엄청난 고통으로 이끕니다.



흔히 디테일에 목숨을 거는 영화감독 봉준호를 '봉테일'이라 한다면, 미술분야에서 렘브란트는 '렘테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만큼 작은 것을 통해 큰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는 가슴으로 그렸음이 분명합니다. 내 이야기에 감정이입한 렘브란트의 솜씨에 감탄하지 앓을 수 없습니다.

그나저나 '내 사랑 데릴라' 아니 '그 망할 년'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래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고통에 범벅이 된 발가락 뒤로 그녀가 보이네요. 그녀는 날아가듯 한 손엔 가위를 쥐고, 남은 한 손으론 전리품인 머리카락을 든 채 도망치고 있네요. 잠시 고개를 돌려 힘없는 나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미안함이랄까, 연민이랄까 그런 표정을 애써 찾아봅니다(아, 그만큼 그녀를 사랑했나 봅니다). 하지만 도무지 보이지 않네요. 배신감에 속상하지만 렘브란트의 특기인 빛과 그림자의 대비로 완성한 그림을 보며 마음을 진정시켜 봅니다. 이 네덜란드인의 붓놀림은 정말 기가 막히네요.


바보 같지만 데릴라는 나를 눈꼽만큼은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그녀를 사랑해서 너무 아프지만… 제기랄, 그래도 그녀가 밉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게 나의 숙명이니까요..




<함께 듣는 곡>

Mon cœur s'ouvre à ta voix(그대 목소리에 내 마음 열리고)

ㅡCamille Saint-Saëns


(데릴라)

그대 목소리에 내 마음이 열려요.

꽃봉오리가 아침의 키스에 열리듯 말이죠.

하지만 사랑하는 당신.

내 흐르는 눈물을 멈춰 주려면

다시 한번 그대 음성을 들려주세요.

이 데릴라에게 영원히 돌아온다고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그 옛날의 약속들을...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세요.

환희에 넘치게 해 주세요.

나의 사랑에 답해주셔요.

나를 환희에 넘치게 해 주세요..

사랑한다는 말을 어서 들려주세요.   


(삼손) 데릴라, 난 당신을 사랑해~~ 


(데릴라)

미풍에 일렁대는 이삭들의 살랑임처럼

내 가슴도 떨리고 있어요.

나를 위로하는 그대 음성을 듣고 싶어서지요.

내 사랑은 더 빨리 당신의 품으로 갈 거예요.

말해줘요, 부디~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세요.

나를 환희에 넘치게 해 주세요.


(삼손)

데릴라, 내 키스로 그대 눈물을 닦아줄 테니

이제 걱정을 모두 잊어요.

데릴라, 당신을 사랑해!


________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 ; 1835~ 1921)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중 2막 3장에서 울려오는 아름다운 아리아입니다. 생상스는 우리에게 ‘동물의 사육제(Le Carnaval des animaux)'로 잘 알려져 있지요.


한밤중에 데릴라의 거처로 찾아온 삼손은  이 노래를 듣고 사랑의 포로가 되어 신과의 비밀을 그녀에게 고백합니다. 그가 ‘데릴라 데릴라(달릴라)'하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이미 파멸의 늪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노래를 듣다 보니 사랑을 고백하는 여인의 진심이랄까, 그런 비슷한 감정이 느껴져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네요.

데릴라는 한 남자의 인생을 말아먹은 희대의 악녀일까요?

민족을 위해 스파이를 자처한 그녀는 오히려 ‘블레셋의 유디트’ 일 텐데 말이죠.

악녀든 영웅이든, 데릴라가 만약 진짜 삼손을 사랑했다면 그들의 사랑은 실로 ‘너무 아픈 사랑’입니다.


https://youtu.be/Y3so7EIhJxA?si=RuCr_HCVnJV8mr0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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