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노년의 시골아낙(Old peasant woman
좌측 경동맥 IMT 비후 혹은 죽상경화반: 두께=max 2.0mm
우측 경동맥 IMT 비후 혹은 죽상경화반: 두께=max 1.8mm
결론: 경동맥에 죽상경화반
얼마 전, 2년에 한 번 받는 건강검진을 했다. 결과보고서가 집으로 배송되었다. 검사 수치를 봤다. 알쏭달쏭. 암호문 같았다. 기준 범위를 벗어났으니 병원을 다시 찾으라는 안내가 들어 있었다.
죽상경화반?
분명 한글로 쓰여 있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검색을 해보았다. ‘심혈관이나 뇌혈관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있고 장기적으로 뇌졸중이나 심근경색등 주요 혈관질환의 발생 위험이 높다.’라고 풀이해 준다.
어제까지만 해도 몰랐다. 하지만 내 몸 어딘가에서 이미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동안 스쳐 지났던 몸의 신호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마음 한켠에 묵직한 불안이 또아리를 틀기 시작했다.
반짝이던 나의 세상은 A4 용지 한 장 앞에서 빛을 잃었다. 결과지를 받은 그날 이후 일상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식되었다. ‘죽음’이라는 낯선 단어가 삶 한가운데에 ‘훅’하고 들어앉았다.
생각해 보니 시어머니도 내 나이쯤에 뇌졸중으로 황망하게 생을 마감하셨다. 나도 시어머니처럼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시집올 때 들었던 흉흉한 말이 비쭉 얼굴을 내민다. ‘이 집안 며느리들은 명이 짧다.’ 두려움이 골수를 타고 퍼져왔다. 당장 내일이라도 어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아려왔다.
좋아하는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운동도 하기 싫어졌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따로 있었다. 하루를 마치며 내일을 그려보던 소소한 설렘마저 잃어버린 일이었다. 밤이 와도 잠자리에 누워 기대할 내일이 더 이상 없었다. 산송장같이 몸도 마음도 서서히 스러져갔다.
하루는 길기만 했다. 불안을 잊기 위해 무작정 인터넷을 헤매다가 <페이스북>에서 한 여인과 마주쳤다. 그 순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세상이 슬로모션으로 흘렀다. 화면을 넘기려던 내 손이 마치 누군가의 손에 잡힌 것처럼 멈춰버렸다. 복부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컥함에, 어느새 두 손은 입을 막고 있었다.
낡은 액자 안에 그려진 듯한 그림. <노년의 시골아낙(Old peasant woman)>(1907). 빛바랜 초록색 배경을 뒤로하고 바위처럼 늙은 아낙네가 앉아 있다. 주름이 깊게 패인 무표정한 얼굴, 앙다문 입술, 가슴에 포개어 놓은 두 손...... 그녀의 손은 손가락 마디가 굵고 단단하다. 힘겹게 땅을 일구고 살아온 흔적이 역력하다. 손등만큼 두텁고 소박한 옷, 머리카락을 감싼 모자도 남루하기만 하다.
전체적인 색감이 땅의 색이다. 짙은 갈색, 어두운 회색, 물 빠진 녹색. 색들이 차갑지도 따뜻하지 않다. 그저 현실이었다. 그 자체로 그녀가 걸어온 삶의 색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내가 오래도록 무시하고 살아온 ‘내 몸’과 마주하게 했다. 그녀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삶을 견뎌낸 그녀의 노곤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듯하다. 수백 년 동안 한자리에 서서 자신의 몸을 지켜온 나무처럼 여인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안은 채, 단단하고 고요하게 버텨내고 있었다.
그림을 본 뒤, 화가에 대해 찾아보았다. 이름도 생소한 파울라 모더존 베커(Paula Modersohn-Becker, 1876~1907). 독일 출신의 화가였다. 처음엔 오랜 세월 붓을 잡아온 노련한 인물일 거라 짐작했지만, 그녀는 뜻밖에도 고작 서른 해 남짓한 삶을 살다 생을 마감한 사람이었다.
19세기말의 독일은 여성에게 가혹했다. 더욱이 여성에게 ‘화가’라는 직업은 그야말로 ‘딸 수 없는 별’이었다. 화실에서 누드화를 그리는 것조차 제약받던 시대에, 그녀는 돌파구를 찾듯 자신의 누드 자화상을 붓으로 밀어붙였다.
실제 임신 중은 아니었지만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자신의 몸을 주체적으로 표현했다. 어떠한 부끄러움이나 도발도 없이 ‘화가’라는 존재를 화폭에 담았다. 그녀가 드러낸 몸은 누군가의 시선에 길들여진 성적 대상이 아니었다. 생명의 기운과 예술의 상상력, 그리고 자신을 향한 조용한 존중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시대를 향한 고요한 선언이었다.
“나는 여성이며, 나는 예술가다. 그리고 나의 시선은 나의 것이다.”
세상이 주지 않은 것을, 그녀는 스스로 부여했다. 그리고 그녀의 그림은 시간을 건너,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내게도 말을 걸어왔다.
베커는 대단한 사건이나 인물보다는 아이, 노인, 농부 등 소박한 사람들을 누구보다 진솔하고 담담하게 묘사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캔버스엔 터질 듯한 웃음도, 무너질 듯한 슬픔도 없다. 그들의 시선은 차갑지도, 따스하지도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 묵묵히 그들의 삶을 받아들인다. 그러한 침묵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을 보는 이들을 말없이 품어주고 있다.
그녀는 오랜 시간을 살아낸 이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시선을 가진 화가였다. 하지만 정작 붓을 든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1907년, 아이를 낳은 지 열아흐레만에 그녀는 이승의 끈을 놓고 말았다.
그림을 다시 열어본다. 여인의 손에 시선이 오래 머문다. 두터운 손. 무심하게 모은 듯 하지만,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감싸고 있다. 든든한 울타리 같은 두 손, 따뜻한 위로의 말과 어깨를 대신해 주는 손, 불안을 어루만지고 온기를 전하는 손. 그 손이 내게 다정하게 다가왔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힘든 일이 있을 때, 괜찮은 척 웃고 돌아서 조용히 양손을 가슴에 포개 놓았었다. 마치 누군가를 안아주듯 말없이 스스로를 감싸왔던 숱한 나날들..
그 손은 곧 나의 손이었다. 나 스스로에게 건네던, 오래된 위로였고 치유였다. 그림 속의 여인이 곁을 내주며, 조용히 함께 견뎌주는 것만 같다.
의료 분쟁으로 결과지를 받은 날로부터 3개월이 지난 후, 가까스로 대학병원에서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병원 대기실은 자신의 이름을 호명해 주기를 기다리는 아픈 사람들로 가득했다. 혼자였던 나는 불안한 숨을 누르며, 그림의 여인처럼 깊이 나를 껴안았다.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려지고 진찰실에 들어갔다. 훤칠한 젊은 의사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검사 결과지와 영상 CD를 한참 살핀 뒤, 그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위중한 상태는 아닙니다. 운동 꾸준히 하시고, 정기적으로 경과를 확인해 보죠.”
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잘 관리하시면 됩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안심해도 좋다. 이제 괜찮다, 괜찮다.
일상이 다시 나를 받아주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쓸 수 없었던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고, 다시 한번 그림을 꺼내 보았다.
여인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상황이 바뀌어서 그런가,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하고 가볍기 그지없다!) 내 눈에 비친 그녀는 이전보다 한결 편해진 모습으로 자신을 안고 있었다.
가슴팍에 포갠 그녀의 주름진 두 손은 더 이상 삶의 무게에 짓눌린 징표가 아니었다. 굳고 단단한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나직한 위로가 스며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On the Nature of Daylight > - 막스 리히터 Max Richter
막스 리히터(1966~ )는 전쟁과 폭력에 대한 비판, 상실, 회복되지 않은 인간의 상처를 표현하기 위해 이 곡을 작곡했습니다.
직역하면 ‘빛의 본질에 대하여’입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빛’은 결코 찬란하거나 눈부시지 않습니다. 묵직한 현악기의 울림이 빛보다는 그늘의 감정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바이올린이 조용히 주제를 연주하고 비올라와 첼로가 뒤따릅니다. 선율은 나지막이 반복되고, 조금씩 변주됩니다.
어떠한 클라이맥스도 없이 그저 잔잔하게 흘러갑니다.
이 곡을 듣는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또 잃어버린 세월과의 관계를, 그리고 누군가는 자기 자신을 껴안았던 시간들을 떠올리겠지요.
이 곡은 슬픔을 달래주는 곡이 아닙니다. 어떠한 감정도 강요하지 않으면서 슬픔 곁에 가만히 앉아주는 곡입니다.
바이올린의 첫 선율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림 속 여인의 고요한 숨결이 방 안 가득 번집니다.
슬픔과 평온이 뒤섞인 음악은 마치 빛바랜 초록빛 캔버스 위를 유영하듯 마음을 훑고 지나갑니다.
그녀의 손이 그랬듯, 음악은 말 없는 눈빛으로 나를 안아줍니다.
시간은 흐르고, 삶은 계속됩니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견디며 나아가는 고요한 여정에, 그림과 음악은 오롯이 내 편이 되어줍니다.
다시 나를 꼬옥 껴안습니다. 나를 안아주는 위로는 어쩌면 견뎌온 시간들에 대한 조용한 인사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나는 같은 자리에서, 천천히, 다시 살아갑니다.
https://youtu.be/b_YHE4Sx-08?si=qIHJfOIFiKLxmla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