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청색시대

-파블로 피카소, <다림질하는 여인>

by 조용진

“염증 수치가 많이 높네요. 우선 약 일주일치 처방해 드릴게요. 다음 주에 다시 검사해 봅시다. 물 많이 드시고 되도록 쉬셔요.”


동네 단골 내과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는 언제나 차분하고 상냥했다. 하지만, 그날은 그녀의 친절한 말투도, 다정한 표정도, 내게는 마치 ‘경고음’처럼 들렸다.


그것은 엄마이자 아내의 몫

며칠 전부터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오늘 아침엔 브래지어 후크를 채우다가 어깨가 너무 아파 비명을 질렀다. 오십견이란다. 치주염으로 무더위에도 아이스아메리카노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방광염이라니... 이제 내 몸은, 뼈와 살보다 염증이 실세인가 보다. 어지간한 조직은 그래도 명목상 대표가 있던데, 내 몸은 지금, 염증이 다 해 먹고 계시다.


가족들은 집안일은 다 내 몫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회사에 막 들어간 막내 딸아이는 매일매일 전쟁터를 다녀온 얼굴로 늦게 귀가한다. 퇴근하자마자 저녁식사도 마다하고 그대로 드러눕는다. 딸아이 방이 난장판이 되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다. 애처로운 마음에 (남편은 말리지만) 또 아이의 방을 정리해 준다. 그런데 이놈의 기집애는 신던 양말조차 제대로 빨래통에 넣을 줄을 모른다. 뒤집어진 양말이 침대 옆이나 책상 아래에 나뒹굴고 있다. 마치 ‘이건 엄마 몫이야’ 하고 말하는 것만 같다. 화장을 지운 휴지는 왜 책상 위에 구겨져 있는지, 도대체 그 잘난 손은 왜 쓰레기통까지 못 가는 건지.....


낯선 곳에 적응하느라 지친 걸까? 요즈음 딸은 예민하게 날이 서 있고, 오가는 말마다 서리가 끼어 있다. 나긋나긋했던, 세상에서 제일 편하기만 했던 내 딸은 사라지고, 지금은 건드리면 세찬 눈보라를 뿜는 ‘겨울왕국의 공주‘다. 한때 “엄마~”하며 내 이불속으로 파고들던 그 아이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다림질하는 여인과 집안일하는 여인

남편은 그래도 나름 다정한 편이다. 단, 말로만. 입은 옷은 옷방에 걸어달라고 입에서 쓴 내 나도록 수만 번은 얘기했건만, 옷은 오늘도 식탁의자, 소파 등받이, 방문 손잡이에까지 (마치 영역표시를 해 놓은 듯) 집안 곳곳에 걸쳐져 있다. 책망하는 나에게 남편은 늘 사람 좋은 웃음으로 답한다. “아, 미안, 또 까먹었네.” 그럴 때마다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저 인간은 바보인가. 치매 초기인가. 그게 아니면 나를 무시하나?’ 셋 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날도 딸아이의 방을 치우고 있을 때였다. 뒤집어진 양말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집어드는 순간, 문득 침대 옆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기운 빠진 어깨만큼이나 축 처진 눈꼬리..... 어딘지 푸른빛이 감도는 내 모습. 그 낯익고 낯선 형체는 마치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의 <다림질하는 여인>(1904) 같았다.


KakaoTalk_Photo_2025-10-20-20-53-29.png 파블로 피카소, <다림질하는 여인>. 1904, 캔버스에 유채, 116.2x 73cm,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


등을 굽힌 채 꾹꾹 무언가를 다리고 있는 여인. 얇디얇은 팔로 힘겹게 다리미를 누르고 있다. 힘이 바짝 들어간 그녀의 어깨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세상의 모든 무게가 그녀의 각진 어깨에 얹혀 있는 듯하다. 푸르다 못해 파랗게 질린 그녀의 창백한 얼굴. 눈은 퀭하니 검게 물들었다. 표정 없는 얼굴엔 삶을 견뎌내는 이의 체념이 스며 있다. 입고 있는 옷조차 그림자처럼 희미하다.


눌리고 지친 그녀의 표정에서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집안일에 눌린 나를 보았다. 지금 곰팡이처럼 곳곳에 퍼진 염증에 몸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어쩌면 내 몸의 염증은 이렇게 푸른색일지도 모른다. 푸른곰팡이 염증! 그녀가 가엾다. 그리고 나도, 가엾다.


집안일로 채색된 나의 청색시대

피카소는 〈다림질하는 여인〉을, 친구 카사헤마스(Carles Casagemas,1880~1901)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뒤에 그렸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 앞에서 그는 몇 년 동안 세상을 오직 푸른색으로만 바라보았다. 거리의 사람들, 늙은 악사들, 고단한 노동에 짓눌린 육체를 통해 세상의 슬픔을 끌어냈고, 푸른색으로 울었다. 우리는 이 시기를 ‘피카소의 청색시대’라고 부른다. 그의 푸른색은 단순한 푸르름이 아니었다. 절망과 굶주림 그리고 상실과 죄책감의 파랑이었다.


피카소는 친구의 죽음으로 ‘청색시대’를 맞이했지만, 나는 가족의 무관심과 쌓이는 집안일로 소소한 청색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중고등학교 시절 시험 한 문제에 바들바들 떨며 바보같이 애쓰진 말 걸 그랬다. 입술이 트도록 공부해 얻은 ‘대학’이라는 딱지가 양말을 뒤집고, 청소기를 밀고, 다림질을 하는 지금의 내게 무슨 도움이 되었을까?


물론 집안일이 하찮아서가 아니다. 다만, 문득문득 스멀거릴 뿐이다.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그렇게까지 애썼던 걸까?” 그 시절, 밤늦게 독서실에서 돌아오며 제대로 잠도 못 자고 퀭한 눈으로 걷던 그 아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난 대체 뭐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나의 청색은

그림 속 여인처럼 살아내 보려고 고군분투했던 나날들. 티도 안 나고, 생색도 못 내는 고단한 집안일에 염증까지 얹은 이 몸뚱이. 인정받지 못한 수고. 돌아오지 않는 고마움. 날카로워진 딸과 식탁 위 셔츠 더미 앞에서 나는 오늘도 고개를 떨군다.


나의 청색은, 애도의 파랑은 아니지만 묵묵히 견뎌내는 파랑이다. 푸른곰팡이처럼 스며들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분명한 것은 그게 바로 내가 살아낸 흔적이다. 오늘도 티 안 나는 하루를 멀쩡히 버텨낸 나는, 비록 ‘경고음’을 들었을지언정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함께 듣는 음악>

어른 - 드라마 <나의 아저씨> OST



어른이란, 슬퍼도 소리 내어 울지 않고, 다리미처럼 마음을 꾹꾹 눌러 무너지는 속을 눙치는 사람입니다. ‘이게 아닌데’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라도, 꿀꺽 삼키고 아무 일 없는 듯 하루를 넘기는 사람. 인생이 정답 없는 서술형 시험이라는 걸 알면서도, 묵묵히 자신만의 답안을 써 내려가는 사람. 저는 그런 이들을 ‘어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고단한 하루 끝에 떨구는 눈물

난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아플 만큼 아팠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남은 건가 봐”


이 노래는 어쩌면 그림 속 여인이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한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단한 하루 끝에 떨구는 눈물”이라는 첫 소절에서 굽은 등을 따라 흘러내리는 삶의 땀방울이 묻어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무게. 그것은 ‘나는 어른입니다.’라고 말하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뒤집어진 양말 하나에도 눈물이 핑 돌지만 그걸 주워 세탁기에 넣는 손길이야말로 ‘어른’의 단단한 몸가짐이겠지요.


“나는 내가 되고 별은 영원히 빛나고

잠들지 않는 꿈을 꾸고 있어.”


이제는 하루 중 단 10분이라도 ‘다리미’ 대신 ‘나님’에게 손을 얹기로 합니다. 기운 빠진 어깨를 토닥이고, 한숨 섞인 마음을 가만히 다독이면서요. 누군가의 엄마, 아내, 딸이기 전에 ‘나는 나’였음을 기억해 내는 일. 그것이 어쩌면 지금 나에게 주어야 할 가장 정직한 보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던 음악, 잊고 있던 그림, 그 시절의 나를 다시 꺼내어 안아주는 시간. 그렇게, 나의 청색시대에도 언젠가는 장밋빛 저녁이 스며들기를 꿈꾸어봅니다.



*원곡은 손디아의 ‘어른’이지만, 가수 정미조의 노래가 마음을 울립니다.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은 그녀의 음색에는, 세월의 비바람을 견뎌온 이들만이 품을 수 있는 담담한 어른의 숨결이 스며 있습니다.


https://youtu.be/7ixueqb1FzU?si=AU0utd4wzv7wh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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