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두 연인(Two Lovers)>(1888)
그녀와 헤어진 지 벌써 다섯 해가 흘렀다.
헤이그. 늘 비가 쏟아질 듯한 북쪽 도시. 잿빛 하늘. 젖은 벽돌 냄새. 그녀를 처음 본 것은 비 내리는 거리에서였다. 한 손에 다섯 살 남짓한 딸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고, 배가 불룩했다. 뱃속에는 또 다른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옷자락은 축축했고, 눈빛은 피로에 절어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녀가 내 삶의 깊은 그늘이자 가장 뜨거운 빛이 되리란 것을.
그녀의 이름은 시엔(Clasina Maria Sien Hoornik, 1850~1904). 시엔과 함께 머물렀던 방 창가엔 비가 그치지 않았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처럼, 그녀는 서서히 내게 스며들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사랑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믿음만으로 그녀의 상처를 감당해 줄 수 없었다. 시엔은 너무 지쳐 있었고, 나는 사랑에 무척 서툴렀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시엔은 그렇게 말했다.
“두 아이가 있고, 몸도 병들었고, 당신은 결국 나를 떠날 거야.”
나는 가난한 화가였고, 그녀는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원치 않는 사내들의 품에 가냘픈 몸을 맡겨야만 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창녀’라고 손가락질했지만, 내 눈에 비친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도 살기 위해 애쓴 고귀한 여인이었다.
함께하고 싶었다. 시엔과 두 아이와 내게 허락된 생을 함께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동생 테오(Theodorus Theo van Gogh, 1857~91)는 완강했다. “그런 여자는 안된다.”며 내 사랑을 가로막았다. 어머니는 말없이 울었다. 나는 끝내 그 눈물과 손사래를 이겨내지 못했다. 쾌쾌한 곰팡이가 피어있는 북쪽의 방. 나는 그곳에 그녀를 남겨둔 채, 햇살이 따뜻한 남쪽으로 향했다. 사랑을 지켜내지 못한 비겁한 사내. 그 이름은 다름 아닌 나, 빈센트 반 고흐(1853~90)다.
그녀를 떠난 뒤, 나는 드렌터(Drenthe)으로 갔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텅 빈 들판. 나는 그곳을 걸으며,
그녀 없이도 살아내리라 애써 다짐했다. 그러나 들판에 드리워진 내 그림자는 늘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 그 후 도망치듯 뉘넌(Nuenen)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잠시 지냈다. 그곳에서 농부들이 거친 손으로 일군 흙과 감자 냄새를 맡으며 한동안 그림에 매달렸다.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잠시나마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나는 또다시 길 위에 올랐다. 남쪽으로, 안트베르펜(Antwerpen)과 파리(Paris)를 지나, 더 먼 곳으로 갔다.
아를(Arles). 햇살이 가득한 도시. 명랑한 노란빛이 길과 건물, 그리고 공기까지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지만, 내 손에 쥔 붓끝은 여전히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따뜻한 아를의 햇살 뒤로, 내가 두고 온 여인의 그림자가 길게 따라왔다. 나는 여전히 북쪽을 등지지 못한 사람이었다.
아를의 노란빛 속에서, 나는 두 사람을 그렸다. 물가를 따라 걷는 사랑스러운 연인. 처음엔 그저 햇살과 바람을 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 붓은 어느새 두 사람 위로 물감을 두텁게 얹어가고 있었다. 연인이 걷는 왼편에는 초록빛 들판이 보인다. 화폭 한 귀퉁이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함께 살 수도 있었던 푸르른 초원이었다. 따스한 빛을 받으며 벅찬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축복의 땅. 그러나 그 들판은 헤어진 시엔과 나처럼 중간에서 숨이 끊긴 채, 끝을 알 수 없는 초록빛으로 멎어 있다.
연인의 오른편에는 강물이 흐른다. 빛을 모조리 삼킬 듯한 짙푸른 물결. 그 흐름의 깊이와 색은 오래된 나의 외로움과 닮아 있다.
여인은 남자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고, 남자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들떠 있다. 나는 그 남자가 나였으면 했다.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그의 등은 웃고 있다. 발끝은 가볍게 튀어 오르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리듬으로 걷고 있다. 단 하루라도, 저런 표정을 지어보고 싶었다. 그런 표정이 있다는 것을, 얼굴이 아니라 뒷모습으로도 기쁨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야 알았다.
남자의 뒷모습에서 사랑 앞에 늘 어설픈 나를 보았다. 서툰 사랑의 표현에 못난 자존심만 앞섰고, 때로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마저 더해졌다. 나는 사람을 좋아했지만, 함께 사는 일에서는 번번이 실패했다. 시엔과도 그랬다.
그럼에도 나는 너와 걷고 싶었다. 화려한 거리도, 고급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식당도 아니었다. 그저 노란 밀짚모자 하나 턱 하니 걸쳐 쓰고, 바람 부는 들판과 풀 내 나는 언덕을 나란히 걷고 싶었다. 네 어깨 위에 내 팔 하나 걸칠 수 있는 그런 소박한 길이면 충분했다. 시엔과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 그 길을 나는 이곳 아를에서 늦게나마 화폭에 남겨야만 했다.
아를의 노란빛 아래로 초록 풀잎들이 낭창낭창 흔들리고 있다. 웃음 짓는 남자는 화폭 안에 머물고, 나는 여전히 그 길을 너와 함께 걷지 못한 채 그저 바람 곁에만 서 있다.
–가브리엘 포레, <Après un rêve>(꿈을 꾼 후에)
‘그대 모습 그리며 잠들었습니다. 꿈에서 당신을 보았어요, 나의 신기루
다정한 두 눈, 부드러운 목소리. 그대는 오로라처럼 밝게 빛났지요.
나는 당신과 함께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구름은 춤추며 우리를 반겼지요. 신비로운 빛 속에 우리는 나란히 걸었습니다.
아아! 슬프게도 꿈에서 깨어났네.
나는 당신을 부른다오, 오 밤이여. 그녀의 모습을 한번 더 보여다오.
다시 돌아와 주오, 신비로운 밤이여!’
포레의 <Après un rêve>는 회한의 노래입니다. 꿈속에서 하늘에 오를 듯한 황홀한 사랑을 나누며 나란히 걷던 연인. 하지만 눈을 뜨는 순간 모든 것은 사라지고 허무와 쓸쓸함만 밀려옵니다.
아름다운 노래 아래 흐르는 피아노 반주는 마치 그림 속 연인의 곁을 따라 흐르는 짙푸른 물결처럼, 깊은 울림으로 출렁입니다. 그 위로 조심스럽게 걷고 있는 노래의 선율은 멀어진 연인을 향해 애절한 손짓을 합니다.
아를의 노란빛 속에서 웃고 있는 연인과 그 길을 함께 걷지 못하고 캔버스만 멍하니 바라보는 남자. 꿈에서는 함께 걸었으나, 현실에서는 닿을 수 없는 거리. 그 둘 사이로 무심하게 출렁이는 물결 위로 빛이 스치고 바람이 지나갑니다.
아를의 노란 햇살 속을 걷는 두 사람 곁에 세 번째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집니다. 그 길을 홀로 걷는 남자, 빈센트의 고독한 뒷모습입니다. 푸른 강물 위로 번져가는 것은 다만 심드렁한 피아노의 울림뿐입니다.
https://youtu.be/qRrdWhKuwQ4?si=if0FD-nyOObFFCb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