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 몰츠의 성공체험; 자아를 깨워라
켄터키 발령
미국 직장 초짜 생활을 동부에 있는 화학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몇 년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미국 중부 켄터키 발령이 났다. 맨 처음엔 내가 무슨 선택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고민하는 척도 해봤는데 사실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늘 하듯이 잘못되었을 때 어찌 될지?부터 생각해 보았다. 이게 이젠 나의 버릇처럼 되었는데, 일단 이렇게 해놓으면 자신감도 생기고 더군다나 위에 기재한 몰츠 박사의 상상력 때문에 현실 적응이 더 잘 됐다. 그 방법은 지금 하려고 하는 새로운 일이 잘 못되었을 때 담 단계로 떨어질 궤도( Orbital)를 미리 직시해 보는 것이었다. 실제 들려다 보니 이것의 담단계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음식이나 만들면서 대형 식당에서 일하면 될 것 같았다. 아직 젊고 영어도 잘하니 못되더라도 뉴욕에서 제일 큰 식당 웨이터나 한식 식당을 하면서 요식업으로 돈도 벌 수 있겠다는 맘도 생겼다. 그랬더니 이번 일로 망조가 난다 하더래도 죽을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왔다. 사실 이거 하나면 나에겐 충분했다. 이거 아니였어도 배짱이 쉽게 생길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이미 1만 킬로를 날아와서 여기 생면부지 한 땅에 왔는데 이 미국 땅에서 중부 그것도 내륙 지방으로 고작 1천 킬로 정도 이전하는 게 큰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실패할 거란 생각보다 잘 되는 거란 생각으로 바꾸어 먹기로 했다. 나의 밑바닥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보이지 않던 힘이 생겼다. 결국 걱정이 줄어들다 보니 몰츠 박사의 상상이 더 쉽게 몰입하게 되었다; 아하~ 켄터키에서 나의 목장에 흰말이 있는 상상, 카우보이모자 눌러쓰고 말에 앉아서 로우프 휭휭 돌리는 상상, 켄터키 시가를 길게 자란 수염 사이에 휙~하고 내뿜는 상상, 켄터키의 유명한 문사인 (켄터키의 특유 밀주)로 제조하는 등의 상상을 했다. 한동안이 지나선 두려움보다 재미있을 거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이후로부터 마음이 점점 더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아주 잘된 일이었다. 이제부턴 뜬 꿈 없이 날아온 발령장이 나를 더 이상 흔들지 못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솔솔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몰츠 박사의 상상을 다시 재 가동했다. 가본 적 없는 켄터키, 영화 속 총잡이들이 켄터키 금괴를 턴다는 그 켄터키가 두려움의 대상이 더 이상 아니었다. 그래서 이사 비용을 챙겨서 미국 중부로 가는 그레이하운드에 몸을 실었다. 그 와중에 50개 주에서 생활 수준이 낮았던 켄터키에선 새로 선출된 주지사가 켄터키에 큰 부흥을 꿈꾸고 있었다.
1997년쯤에 처음으로 켄터키 주지사, 폴 패튼( Paul E. Patton)은 북부 주에서 공장들을 이주시키기 위해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는데 그것이 10년간 세금을 면제 주겠다는 법령과 공장 부지를 거의 헐값에 매도하겠다는 공포 했다. 참고로 폴 패튼은 켄터키에서 태어나서 거기에서 자라면서 사업까지 하던 자여서 그는 켄터키를 떠나 본 적이 없는 말 그대로 힐 필(미국 말; 촌놈)이었다. 그는 석탄산업으로 돈을 벌었고 그 당시 서민을 대표로 하던 대통령, 빌 클린턴과도 친했다. 갑자기 이 공표에 미국의 산업들은 세금과 노동조합 때문에 버거워하던 북부 쪽 기업들은 한 번쯤 생각해 볼만했었는데 우리 회사가 이 공표가 떨어지기도 전에 켄터키에 공장을 짓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곤 졸지에 동부 쪽에서 일하던 나를 프로젝트 책임자로 꼽았다. 나는 미국에 집도 절도 없던 때여서 켄터키이던, 텍사스이던, 알래스카이던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년을 살았던 동부를 떠난다는 것은 그리 편히 않는 일이었다. 사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이런 조건에 부합해서 뽑힌 사람이 바로 나였다. 다른 직원을 만약 보내면 아마 전근이란 이유로 퇴사할 거라고 회사가 생각했던 모양인데, 그러다 보니 내가 기니피그(Guinea Pig; 희생양, 실험 대상)가 된 셈이었다.
나에겐 어쨌든 봉급도 쪼금 올려준다니 뭐라 딱히 불평할 일도 없었다. 사실 이렇게 내가 선택에 여지가 없도록 회사가 마구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내려보내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 당시까지도 영주권이 없었다. 그러니 운영 실력이 월등해서 뽑은 것도, 나의 실무 경력 아니면 프로젝트가 망할 지경이어서 뽑힌 게 아니었다. 한마디로 만만한 홍어젖이었다. 이 미국에 살면서 그 영주권이란 게 있으면 별게 아닌데 그게 없으면 이것저것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다른 회사로 이직하려 해도 스폰서링에서 걸렸다. 스폰서링을 서 주는 회사는 이민 고용자 때문에 자기네 회사가 얼마의 매출에, 얼마의 순이익을 내는지?를 이민국 모두 알려 바쳐야 했다. 미국의 90년대였지만 고용주들이 이걸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지금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그 법은 더 심해졌다지만, 그 당시도 좀처럼 스폰서링을 서 주지 않았다.
나는 어딜 가든지 멘토가 항상 필요로 했다. 멘토가 좋은 조언을 주면 더더욱 감사할 일이지만, 막상 얻으려는 조언을 못 얻었더래도 나의 상황을 멘토가 이해할 정도로 설명하고 있으면 벌써 50%의 해결책이 나의 머릿속에서 나오곤 했다. 해서 미국에서도 나의 멘토가 있었다. 미국 회사일을 하면서 알게 된 인연이 있었다. 미국 생활을 미리 하신 멘토 박사님으로 미국 명문대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정유회사에서 근무하셨고 무슨 일이 생기면 그에게 묻곤 했었다. 나보다 연장자이면서 오랫동안 연륜이 있었던 그가 미국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물을 수 있었던 유일한 나의 카운슬러였다. 늘 좋은 조언을 주시는 분이었는데 이번엔 나의 멘토가 한번 시골로 내려가면 다신 주요 도시 쪽으로 올 수 없을 테니 차라리 다른 동부 쪽에 스폰서링을 해주는 회사를 알아보라고 강력하게 말렸다. 그런데 사실 켄터키에서 나의 멘토 박사님이 예상한 것보다 더 혹독한 고생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