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그리움이 원망으로 치환될 때
송산역에서 지우펀행 1062번 버스를 탔다. 이른 아침이라 버스는 텅텅 비어 있었다. 나는 일부러 뒤쪽 창가로 가서 앉았다. 낯설다는 말은 설렘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말을 BGM처럼 느끼며 스쳐 지나가는 낯선 그러나 매력적인 풍경들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버스는 타이베이시를 빠져나와 지우펀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이국적인 풍경들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이혼 후 처음으로 느끼는 편안함이다.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을 때 느끼는 편안함을 즐기며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무심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버스가 산속으로 접어들면 지우펀이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눈 아래 펼쳐지는 하늘과 숲이 만나는 곳에서 구름이 만들어지고,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숲을 감싼다. 이런 걸 바로 운무라고 하는 걸까? 선협물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을 몇 번이나 지나고서야 버스는 지우펀 아래쪽 정류장에 정차했다. 비탈길을 올라가니 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건물이 나타났다. 화려한 단청과 금방이라도 하늘로 치솟을 기세인 용까지 꼭 지우펀을 수호하는 신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나중에 듣기로는 누군가를 기리는 사당이라고 해서 잠시 어리둥절했다. 참으로 요란스럽게 죽음을 기억하게 만드는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헉헉거리며 비탈을 올라가자 한눈에 바다가 보였다. 산의 기억이 바다의 그리움과 만나서 만들어내는 아련한 해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바다를 바라보며 홀로 서 있는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서서 바다를 지켜보았을 나무 앞에서 나는 갑자기 울컥했다.
육지를 향한 그리움을 품고 해안으로 달려오는 파도를 지켜보았을 것이며, 닿지 못하는 분노에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날이면 반짝이는 푸른 바다를 지켜보았을 나무 앞에서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검은 고양이가 다가오더니 나의 곁을 맴돌며 꼬리를 다정하게 스친다. 녀석이 나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왠지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떠나지 않고 나의 곁을 머무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말이다. 요즘은 모두 나의 곁을 떠나고 있어서 고양이 스침조차도
감동이다
.
엄마는 허 샤오시엔 감독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가 만든 영화 <비정성시>의 무대가 된 지우펀에서 살기로 했단다. 물론 엄마에게 들은 것이 아니라 엄마처럼 곁에 있어 준 이모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스펀을 배경으로 한 초여름 신록 같은 첫사랑의 이별과 슬픔을 담담히 그려낸 <연연풍진>의 포스터가 거실에 걸려 있던 것을 또렷이 기억한다. 소년과 소녀가 철길을 뒤로하고 걸어가는 사진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엄마는 거실 벽을 이끼 색에 가까운 초록으로 칠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영화를 찾아서 보고 난 후 엄마가 왜 벽을 초록색으로 칠했는지 알게 되었다. 영화에서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나타나는 초록의 숲이 너무나 선명해서 마치 초록이 환호성을 지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청춘의 터널을 지나니 빛처럼 선명한 초록이었다’ 쯤으로 묘사하면 좋을 것 같은 장면이어서 종종 오월이면 일부러 찾아보는 영화다. 그 시절 엄마도 혹시 초록을 기다리며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시간을 견디고 있었던 것 아닐까? 나는 엄마의 카페 <유시모광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고양이를 따라 <유시모광> 앞에 섰다. 녀석이 나를 안내라도 하듯이 앞서가더니 데크에
나른하게 엎드렸다. 자신의 임무는 여기 까지라는 듯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서 한숨을 크게 내쉰 후 <유시모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순간 나는 오래전 살았던 옛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초록빛 거실과 영화 <연연풍진>의 포스터가 생각났다. 음악은 엄마가 항상 거실에 분수처럼 틀어놓던 재즈가 카페 안에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 음악 오래전 내 유년의 기억을 일순간 되살렸다.
“왔니?”
엄마가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마치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말이다.
계란말이를 만들고 새벽부터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오븐에 마들렌을 굽고, 달콤하고 고소한 버터향이 입안 가득 퍼지는 마들렌을 입에 넣어주고 엄마는 떠났다. 오랫동안 마들렌은 그리움이었다가 어느 순간 원망으로 치환되었다.
카페 안은 그날처럼 마들렌 굽는 냄새가 가득했다.